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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김기창의 <정청 靜聽>(1934)

이석우

생활문화의 근대화 도입과정을 담아
그림은 어떤 모양으로든 그것이 태어난 시대를 담고 있다. 작가의 개인사와도 무관할 수 없다. 김기창( 1913-2001)의 <정청>은 1934년 조선미술전람회 13회 입선작이다. 그 무렵 일제 식민지하의 조선에도 서양의 근대화 물결이 밀려들었다.
지금은 낯설어 보이는 1930년대이지만 기실 오늘 우리의 현대가 깊게 자리잡아가던 시기이다. 이 때 신문물의 상징들은 라디오, 영사기, 축음기, 재봉틀이었다. 재봉틀은 1877년 처음 들어온 이후 모든 여성들이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현대물이었다. 나의 어머님께서도 싱거미싱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고 애지중지 했는지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 그림의 좌단에 축음기가 우뚝 놓여 있다. 단연 우리의 시선을 잡아당긴다. 그 화면상의 비중으로 보아 우측의 두 모녀에 버금가는 만큼의 무게 균형을 잡고 있다. 당시 유성기가 차지하는 사회적 가치인식을 말해 주는 것이자 작가의 의식을 얼마나 크게 점하고 있는지를 짐작케 한다. 서양식 객실 공간이 훤칠하게 넓고 벽은 오렌지색으로 밝다. 여기에 등 나무소파와 테이블 등은 이미 앉는 의자문화가 상당히 보편화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중앙에 앉은 어머니상의 여인은 그 시절 유행인 쪽머리를 얌전하고 정갈하게 빗어 내렸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풍기는 전체 분위기는 단연“모던 걸”,“ 단발미인”,“ 양장미인”이다. 모던을 당시 한자로 <모단(毛斷)> 이라고 썼다한다. 이 표기는 머리를 자른다는 뜻이기도 해서 단발미인과 “모던 걸”은 같은 의미로 통하였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요즈음 말로 개량한복에 해당한다. 1920년대 속옷 개량이 큰 폭으로 이루어지고 저고리의 길이가 길어진 반면, 옷의 겨드랑이에서 소매 끝까지 이르는 화장은 짧아졌다. 통치마 또한 길이가 줄어서 이미 발등 위까지 살짝 올라앉았다. 저고리와 치마 천은 남회색의 모본단 고급 비단으로 잠자리 형과 체크무늬가 현대감각을 더해준다. 신발은 가죽구두로 바뀌어 있는데 발에는 버선대신에 양말을 신었다. 곁에 앉은 단발머리 소녀는 왼손에 장난감 공을 껴안았고 옷 무늬는 더욱 현란하다.



이 그림과 관련하여 몇 가지 논의들이 있어 왔다. 무엇보다 일본화풍이 짙다는 지적이다. 이 그림이 출품된 당시에도 미술비평가들 사이에는 조선주의 즉 우리 미술이 무엇이며 일본화풍의 문제가 무엇 인지에 대한 논의를 계속하고 있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우리의 것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탐구라고도 하겠는데 그 점에서 이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운보 김기창을 얘기할 때 피해가기 어려운 것이 친일 논쟁이다. 해묵은 이 얘기를 다시 꺼내는 것은 그의 미술 기량이나 역량이 뛰어남을 외면해서가 아니다. 해방 후 변신의 변신을 거듭하여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불굴의 예술정신을 과소평가 하려는 것 또한 아니다. 수많은 이 나라의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하고 그에 못지않게 그들에게 희망을 주어온 사실을 일부러 잊으려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해방 후 그가 보여준 처신과 행적이다. 그는 3.1 문화상(1971)을 받는가 하면 그 심사위원이 되었다. 의병장 조헌의 영정, 을지문덕과 신승겸 등의 영정까지 제작하여 국가표준영정으로 지정받기 까지 했다한다. 부끄러운 일이다. 적어도 이런 일들은 삼가 했어야 한다.
그같은 정체성의 혼돈은 우리 민족사를 뒤죽박죽 혼란으로 빠뜨린다. 무엇을 기준가치로 하여 우리 역사를 해석 평가할 것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적 청산도 외면하기 어렵지만 여러 영역에서 실행되어야할 비식민주의화(decolonization)조차 이루어 지지 않고 있음이 오늘의 현실임을 어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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