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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기부는 완성된 삶의 길목에서 이루어진다

탁계석

신용이 무너지는 사회
세계적인 신용평가그룹인 무디스(Moodys)는 경제 상황을 알리는 공인된 지표다. 무디스 등급에 빨간 불이 켜지고 더 심해지면 파산 선고를 알리는 경고음이 울린다.
우리가 실제 무디스를 느낀 것은 IMF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사회에서 경제를 제외한 신용등급 상황은 어떠한가. 일반적으로 ‘신용’은 ‘약속’이라 할 수 있고 ‘약속’은 ‘정직한 믿음’에 기초한다. 예전엔 은행이 신용의 상징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신용카드가 생기면서 ‘신용’을 내세운 카드 사들의 검은 이속 채우기는 신용불량자만 양성한 체 막을 내렸다. 신용사회를 이끌겠다는 당초의 의도가 불량사회를 도래케 한 단초가 되고 말았다. 가계 부채 260조, 400만 명의 신용불량자, 무 소득자 180만 명에게도 카드발급을 해줘 오늘의 카드대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로써 가계 파탄과 목숨 끊는 사람만 늘어났고 부메랑이 되어 카드사의 자업자득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은행이 예술가의 잠재력을 믿고 자금을 지원을 해줄 안목이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런 멋진 은행을, 그런 세상을 생전에 기대하는 것은 망상일 것이고 이미 돈세상이 되어 버린 세태에서 예술가들은 오로지 예술적 가치와 자존심으로 생존할 수밖에 없다. 돈이 이기는지 정신이 이기는지의 결과는 예술사가 증명하듯 늘 예술의 승리였다. 돈은 오늘의 배를 채울지언정 영혼의 배를 채울 수는 없었다.


예술가가 푸대접 받는 현실
가곡 보리밭의 작곡가 윤용하 선생은 굶어서 돌아가셨다. 그 가난한 작곡가가 수해 이재민 돕기에 방송국에 가서 자신의 외투를 벗어 준 일화는 유명하다. 작곡가 최영섭 선생은 늘 우리사회가 예술가에 너무 푸대접하고 이런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매한가지라고 했다. 예술을 모르는 사회가 어찌 발전할 수 있겠느냐며 푸념한다. 애써 모은 자료들이 지하 방 가득히 있는데 이를 어찌할 수 없어 이사도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도 돈 세상에서 일어나는 웃음거리는 도처에 비일비재하다. 땅의 地氣(지기)를 멀리하고 天氣(천기)를 받으려는지 점점 높게, 점점 넓게, 점점 폐쇄적이 되어 가는 초고층 아파트는 식물들이 견디지 못하고 , 모기 한 마리 들어올 수 없는 철저한 경비가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다. 내가 아는 한 바이얼리니스트는 이곳에서 밤 2시에 연습을 해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은 만큼 방음이 잘되어 있지만 답답해 사람이 살수 없다며 다른 곳을 찾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곳에선 자장면을 시키면 불어서 먹지 못한다고 했다. 방문객에 대한 경비 검색 절차가 까다로워서 나온 말이다. 또 이런 해프닝도 들린다. 밤늦게 피자를 시킨 주인이 배달점원에게 팁으로 10 만 원권 수표를 주어 소문이 나 이 동네 점원들이 이곳 배달만 학수고대해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이다. 급기야 일전에 만난 한 여류소설가는 이를 소재로 소설을 쓰기 위해 자료를 소집 하고 있다고도 했다. 김홍신의 인간시장 2탄이라고나 할까. 결국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출발한 주택사업이 프리미엄을 등에 업고 미래 도시 환경을 어떻게 망칠 것인지 그 재앙이 두렵기만 하다. 한 채에 수십억 하는 아파트가, 하룻밤 새 에도 수억 원씩 뛰는 강남 불패 신화로 숨 막히는 초고층 아파트 정글을 만들어 간다면 이는 암울한 것이다.



생존에 허덕이는 이중섭의 후예들
먹을 게 ‘게’ 밖에 없어 제주도 바닷가 ‘게’로 허기를 채웠던 화가 이중섭이 ‘게’에 미안한 마음으로 그렸다는 그 ‘게’가 살아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사실 몇 몇 잘나가는 화가들을 제외하면 그 대부분이 오늘의 이중섭을 살고 있다. 그러나 이중섭 미술관이 만들어 졌지만 그의 집에는 정작 원화가 없다. 박수근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사회 백만장자는 많지만 그 그림 한 점이라도 구입해 채울 만한 부자는 없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갤러리 현대 박명자 대표가 나섰다. 이중섭의 최근 구입 작 ‘파란 게와 어린이’를 비롯해 한국근현대사의 대표 작가 38인의 54작품을 기증해 기증을 해 울고 있는 미술관을 달래어 주었다. 생전에 배가 고팠던 한 위대한 예술가의 기념관이 또다시 속을 채우지 못해 허기진 체 바다만 바라본다면 그 허망한 가슴을 무엇으로 채우랴. 박 대표는 지난 4월에도 강원도 양구의 박수근 미술관에 유화 굴비를 비롯해 55점을 기증했다. 상업화랑의 대표가 아니라 우리나라 100대 기업이 못한 일을 한 한 것이니 어찌 감동이 아닌가.
이는 예술가의 깊은 정신 교감이 몸에 베여 실천으로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높은 경지의 인생 완성을 향한 길목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중섭 미술관 제 모습 갖추기에는 제주의 이왈종 화백의 노력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大商은 예술가다
‘작은 이교도’란 뜻의 파가니니(Paganini)는 시대를 초월한 비르투오조였다. 그는 도박을 좋아해 여러 번 악기를 전당포에 잡히기도 했다. 어떤 때는 악기가 없어 연주를 못할 뻔 한 적도 있었다. 이때 악기사가 그에게 악기를 주었다. 이때의 악기 사들은 그저 악기 장사꾼이 아니라 예술가였다. 천재를 볼 줄 알았고 명기가 누구 손에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예술가에 대한 귀족들의 지원 역시 예술의 깊은 이해로부터 나온 것임을 생각할 때 그간 우리 문화정책 이 무엇을 했었는가 하는 자책이 앞선다.
늦게나마 이번 미술관 내실 채우기 같이 예술계 스스로의 자구 노력이 우리 예술을 다시 살리는 원동력이 될 것으로 믿는다. 우리 안에서부터 다시 예술 정신을 복원해야 한다. 혼탁한 상업주의와 맞서는 길은 올곧은 예술정신 밖에 없다. 한 뼘 얼굴 동네에서 ‘눈과 귀’는 멸시당하고 ‘입과 배’만 호사하는 천박기류를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우리사회 전반에 급격한 ‘품격 상실’이 일어나고 있고 그 도미노 현상의 심각성을 지적한다. 이런 때에 이중섭 미술관을 향한 진솔한 작품 기증은 우리에게 일말의 꿈과 희망이 있음을 확인시키는 쾌거다.
‘기부’란 부의 정도에서가 아니라 예술의 이해와 인생의 완성에서 결정된다.
수도권 이전 논란으로 평화롭던 충청도의 전통 마을들이 흥청망청 향락의 불야성을 이루고 혈족들이 송사로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돈이 가는 곳 마다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정신 바탕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생 돈만 지키다 돈 에 구속되어 미술관이나 음악회 한번 가지 않고 일생을 마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무엇보다 감동 없이 천박한 도락에 빠져 사는 것이 잘사는 것으로 비쳐지는 사회 현상을 경계해야 한다. ‘웰빙’인지 ‘골빙’인지 말은 웰빙 시대라 하면서도 그림이 걸려야 할 자리에 대형 벽걸이 액정 모니터만 불티가 나게 팔린다니 빗나간 웰빙이 상업적 눈속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나에겐 얼마 전 임만혁의 ‘침묵의 바다’김종학 화백의 설악, 신동권 화백의 ‘일출’을 보면서 ‘우리’가 더 행복한 것이라 다짐했다. 정부에서 기초문화를 살린다, 기금을 어쩐다하지만 늘 위대한 예술은 제도권 밖에 있는 법. 본질을 읽지 못하고 여론에 따라 우왕좌왕 하는 탁상행정의 한계로는 예술이 살수 없다. 그런 대상의 예술은 값싼 예술일 것이다. 인생의 완성을 생각하고 예술에 대한 기부를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보다 훨씬 소중하게 생각하는 열린 예술적 사고가 우리에겐 언제쯤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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