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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미술동네 촌장 이규일 수장전에 쏠린 온정

정중헌

한국 미술계는 지난 40여년 동안 양적으로 팽창했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다. 이해상관을 따져 이합집산하고, 파이를 넓히기 위한 공존보다는 서로 비방하고 시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미술동네에는 화가들을 주축으로 화상이 있고 컬렉터가 있다. 언론과 평론도 큰 몫을 하고, 화구와 액자와 운송에 이르는 네트워크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화가들의 권익을 위한 미술협회가 있고, 화상들은 친목과 정보 교환을 위한 화랑협회를 두고 있다. 감정기구도 있고, 미술 전문지들도 여럿이다.

그런데 미술동네는 제각각이어서 화합이 되지 않는다. 이중섭 박수근의 위작이 수천 점 나왔는데도 몇몇 외에는 강 건너 불 보듯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을 사간동에 유치하는 일도 흐지부지되는 양상이다. 미술시장은 커졌지만 화가들은 뒷전으로 내몰렸고, 신인들의 등용문은 여전히 비좁다. 미술계 인프라를 확충하고, 공신력을 회복하고, 미래의 자산인 신인 발굴과 육성에는 뒷짐을 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오로지 상술만 판을 치다보니 미술계가 삭막 할 수밖에 없다.





이 모두가 미술계에 어른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사리사욕을 떠나 미술계 공동의 이익과 단합을 위해 헌신하고 현안을 조율하는 지도자가 미술계에 있는 것일까 자문해 볼 일이다. 미술계가 작고 어려웠던 시절에는 그래도 존경받는 어른들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규모로 세를 따지고, 파이를 쪼개는 일에만 집착하는 양상이다.

이런 미술동네에 옛 마을의 촌장 같은 분이 있다. 중앙일보 기자출신의 이규일 선배다. 그는 미술기자 시절에 운보 김기창 화백과 세계일주를 할 만큼 유대가 깊었고, 이당 김은호 화백과 월전 장우성 화백의 일대기를 장기 연재해 책으로 펴냈다. 중앙일보를 그만 두고 호암갤러리 큐레이터로 일하다가 ‘월간미술’ 부장과 주간을 역임했다. 또한 인사동에 미술연구소 미술사랑과 출판사 도화서를 차려‘한국의 춘화’등을 펴냈다. 그 후 사재를 털어 월간 미술전문지 ‘아트’ 를 창간했다. 그로 인한 부채도 안고 있다. 감정발전에도 일익을 담당했고, 지난해에는 백남준 추모문집을 편집하기도 했다.

내년에 칠순을 맞는 이규일 선배에게 얼마 전 병마가 덮쳤다. 방사선 치료를 받느라 그 좋던 혈색이 창백해졌고 거동도 불편해졌다. 매일 인사동 사무실에 출근해 글을 쓰고 미술인들과 만나 담소를 나누던 그가 투병하고 있다는 소식은 필자뿐 아니라 그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충격과 아픔을 주었다.

미술기자를 함께 하며 친분을 쌓은 필자가 본 이규일 선배는 미술계 현상을 취재하기 보다는 심층에 접근해 뒷이야기까지 캐내는 천부적인 전문기자였다. 화가를 취재하기 위해 먼저 화가들과 돈독한 인간관계를 쌓았고 노소를 막론하고 그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눴다. 화가뿐 아니라 화상들과도 신의를 두텁게 쌓았다. 이 선배는 미술계나 동네 사람들에게 득이 되는 일을 했지 실이 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미술기자에서 큐레이터, 전문지 발행인을 거치며 두루 쌓은 경험과 풍부한 식견, 그리고 인간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미술계의 공동이익을 위해 일 해온 촌장의 병고는 우리 모두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미술계는 쾌유를 염원한다
이규일 선배의 장점은 미술계 네트워킹이다. 서로 각각인 미술계에서 그는 화가와 화상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고, 미술동네 모든 사람들을 연결하고 묶어주는 사랑방 어른의 소임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웃는 얼굴로 모두를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으며, 미술계 일이라면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어떤 대화에도 거침이 없었다. 구수한 농담도 자주 했지만 그에게는 남다른 격이 있었고 경우와 사리가 밝아 누구에게나 신임을 얻었다.

이 미술동네 촌장 어른이 병고에 시달리자 사방에서 위로와 격려가 넘쳤고 지인들의 온정이 답지했다. 내년 칠순에 저서를 내고 소장품 전을 열려고 했다는 이 선배의 말을 듣고 그를 아끼는 미술계 인사들이 전시회를 주선했다. 필자를 비롯해 화가, 화상, 평론가, 기자들이 <이규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어 전시를 도왔고, 삼청동의 리씨갤러리 이영희 관장이 장소를 제공해‘맑고 격있는 이규일 수장 청완 작품전’을 열었다.

전시작 대부분은 이 선배가 소장해온 작품들이지만, 화가와 화상 몇 분이 기증한 작품들도 함께 걸렸다. 미술동네 사람들은 그의 쾌유를 빌며 대다수 작품을 구입해 주었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오픈 날에는 미술계, 출판계, 언론계 선후배들이 참석해 축하해 주면서 건투를 빌었다. 이날 이규일 선배는 여전히 쩌렁한 목소리로 미술동네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고, 꿋꿋이 병마를 이겨내겠다고 다짐해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이규일 선배는 한국 미술계의 산 증인이기도 하지만 동네 촌장같은 존재다. 타산적인 미술계에서 그의 존재는 앞으로도 절실할 것이다. 이번 이규일 수장전에 보내준 지인들의 따뜻한 정은 자상한 그의 인품과 역할에 대한 존경이자 그의 쾌유를 진심으로 비는 염원의 발로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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