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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최순우와 한국 현대미술

이경성

최순우하면 국립박물관장으로서 한국고미술에 걸친 폭 넓은 지식과 독특한 감각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지마는 그는 한국현대미술에 대해서도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또, 미술가들과 직접적인 교제로 많은 일을 하고 그의 발자취는 한국 현대미술의 커다란 업적을 남기고 있다. 최순우(崔淳雨 1916-1984)는 나보다 세살 연상이며 개성 출신으로 송도고보를 나와 개성박물관에 근무하면서 당시 고유섭 관장에게서 감화를 받고 고고미술에 뜻을 두고, 고고미술학자로 국립박물관에서 미술과장, 학예연구실장, 박물관장으로 평생을 바쳤다.
나와의 관계는 국립박물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나로 하여금 한국 현대미술사에 연구를 유도하고 나와 더불어 많은 일을 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국립박물관이 부산으로 피난 갔을때에 그 좁은 국립박물관의 방 하나를 마련하고 <현대미술작가초대전>을 개최하여 호평을 받았다. 1953년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고 나서는 남산에 있는 외성대(옛 조선총독관사)에 임시 국립박물관에서도 장욱진 등 작가를 앞세워서 어린이 박물관 학교를 개설한 일도 있었다. 더욱 1954년 국립박물관이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하고 1957년 4월에는 미국 시애틀미술관의 순회전인 <미국현대회화조각 8인전> (마크 토비, 모리스 그레브스, 가이 앤더슨, 케니드 개라한, 데이빗 헤어, 세어머 립튼, 에지오 마타 에리, 라이스카판)을 박물관에서 가져 우리 현대미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63년 <판화5인전> (유강렬, 김봉태, 김종학, 윤명노, 한용진)을 개최하는 등 현대미술의 전문가도 뒤따를 수 없는 탁월한 기획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유강렬, 정규 같은 작가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미술연구소를 박물관에 설치하고 1958년 미국 록펠러재단 초청을 주선하여 유강렬은 뉴욕으로 가서 판화를, 정규는 로체스터에서 도자기를 연구하기 위해 파견하였던 것이다. <




1963년에는 김환기 등과 더불어 한국미술평론인회를 창설하고 1대 회장은 김환기, 2대 회장은 최순우가 맡아 한국 미술평론에도 초석을 닦았다. 미술평론인회는 김환기가 1963년 미협이사장일 때 베니스비엔날레 참가를 타진하던 바, 그 나라의 3개 단체로 미술협회, 박물관협회, 평론가협회가 있어야 된다는 서신을 받고 우리나라에는 두 단체만 있어 미술평론인회를 창설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물론 그전에도 화가, 평론가들 모임의 부침이 있었다.
석조전에 있던 국립박물관 최순우 미술과장실에는 고미술을 전공하는 사람보다도 오히려 현대미술가들이 드나들었는데 김환기, 이중섭, 장욱진, 김기창, 김인승, 박고석, 이유태, 천경자, 변종하, 문신, 전성우, 이구열, 이흥우, 이종석, 맹인재, 신영훈, 김수근, 김익영, 이수재 등이 자주 모였는데 그들이 주기적으로 모이기 위해 가칭 '미술당'을 만들고 여러가지 행사도 갖고 여행도 했다. 최순우를 정점으로 모인 이들은 지금까지도 그가 떠나고 나서도 한달에 한번씩 모여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 그 후 1972년 경복궁에 박물관 신축이전, 1986년 중앙박물관이 옛 중앙청건물로 확장 이전 등 많은 역사적인 일 때문에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배려는 멀어졌다. 하지만 미술가들과 인간적인 유대로 말미암아 한국 현대미술이 방향설정에 힘이 되었다. 최순우는 직접 간접 한국 현대미술가들과 교분을 통해서 현대미술발전에 기여했고 나로 하여금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발령받도록 추천한 것도 그 였다. 이는 그 당시 행정직 공무원이 차지했던 국립극장, 국립현대미술관, 국악원 등 문화기관의 기관장을 1981년 대통령령으로 전문직이 맡도록 개편하는 일대 용단을 내렸는데 그 배후에는 최순우가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최순우, 그는 전공인 고미술은 물론이거니와 한국 현대미술에도 폭 넓은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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