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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멋쟁이 수화 김환기에 대한 추억

이경성



‘멋쟁이 수화’란 말은 1947년경 경복궁 자경전에 있었던 국립박물관 사무실에서 몇 사람이 모여 미술연구회라는 것을 만들고, 일주일에 한번씩 모였었는데 그 자리에서 근원 김용준이 수화 김환기를 추천하면서 멋쟁이 수화라고 하였던 것이다. 수화는 공무원들의 모임이라고 그 자리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결국 근원과의 관계 때문에 직, 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내가 수화와 자주 만난 것은 1954년 인천박물관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 홍익대학교의 강사로 있게 되는데, 이때 종로 장안빌딩의 임시 홍익대 교사에서 수화를 비롯한 홍대 교수들과 자주 만났던 것이다. 이 당시 수화는 성북동에 살고 있었는데 종로까지 매일 아침 창경원 담을 끼고 약 1시간동안 걸어서 장안 교사에 도달했던 것이다. 수화가 살고 있던 성북동 집은 시냇가를 끼고 약간 언덕진 곳에 있었는데 그 곳에는 가냘픈 다리가 있었다. 다리를 건너서 대문을 들어서면 가운데 마당이 있는데 그곳을 백자항아리로 가득 채우고, 그것도 모자라서 마루 밑과 안방까지도 채웠을 정도로 많았다. 수화 말에 의하면 원고를 쓸 적에 방에다 둔 백자를 어루만지면 머리가 풀려서 원고를 자연스럽게 쓰게 된다고 했다.

그 후 홍익대학교가 와우산으로 이사가고 나서는 강의 시간도 많아지고 바빠졌는데 이론 선생이라곤 나 하나뿐이고 모두 실기 선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교수회의 때 실기시간과 이론시간을 구분해서 만들어 달라고 얘기했더니 수화가 웃으면서 이선생도 실기선생이 되었으면 좋았을 걸 하고 받아 넘겼다. 그러면서 그 다음부터는 4대 2로 시간배정을 할 정도로 아량이 있는 사나이였다. 그때 수화는 학교 앞에 간이 주택에 살고 있었는데 마당 한가운데 지금은 몇 억원이나 되는 백자달항아리가 아무렇게나 놓여서 풍치를 돋구는 것이었다.

얼마 후 김향안 여사가 먼저 파리로 떠나 자리를 잡고 1년 후에 수화가 1956년 파리로 가서 세계 미술계를 직접 대면하게 되는데 그때 때때로 날아오는 편지에 의하면 구라파 미술이 한국미술보다 마음에 안드는 양 비판적인 글을 보내 왔었다. 그래서 그림은 여전히 한국에서 그렸던 소녀상과 항아리 그림 등을 계속 그렸던 것이다.


사슴 에 얽힌 추억

한국에 돌아와서 홍익대학에 학부장이 되고 바쁜 나날을 가졌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에 4시간은 연구실에 가서 그림을 그렸다. 이때 연구실은 도서관 아래 쪽에 있었는데 입구 쪽이 당시 도서관장을 하고 있던 내 방이고 맨 끝 방이 학부장을 하고 있던 수화의 방이었다. 10여개가 되는 연구실을 늘 쓰는 사람은 학부장인 수화와 도서관장인 나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난데없이 자기 작품인 사슴그림을 들고 와서 벽이 심심하니까 걸라고 손수 걸어놓았다. 또 얼마 후 옹방강(翁方綱)이 쓴 ‘자이당(自怡堂)’이라는 편액을 가져와서 이쪽면이 심심하니 여기에 걸라고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만큼 남의 방에까지 신경을 쓰는 것이었다. 후일담이지만 이 사슴 그림을 돈에 궁한 내가 200만원에 친구한테 양보하였더니 그 그림이 그 후에 4억원이 될 정도로 좋은 그림이었다.

그 후 수화는 1963년도 상파울로 비엔날레 커미셔너로 브라질에 건너가고 그 길에 미국에 들려 주저앉고 말았다. 미국에서 수화는 서울에서 항아리 든 여인을 그리던 시절과는 달리 몹시 현대적인 감각으로 작품을 제작하였다. 파리시대에 없었던 감동이 뉴욕시대에서 현대문명에 큰 쇼크를 받은 것 같다. 뉴욕의 마천루를 창으로 연상했는지 점을 작품에 찍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라는 명작을 남겼다. 나는 수화에 관한 책을 1980년 <수화 김환기-내가 그린 점 하늘 끝에 갔을까(열음사)>와 증보판으로 2002년 <김환기의 삶과 예술-내가 그린 점 하늘 끝에 갔을까(아트북스)>를 펴낸 바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74년 뉴욕에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병중에서도 꾸준히 일기를 써왔는데 그 일기에 의하면 죽기 이틀전에 최순우의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평상시 존경하고 좋아했던 수화와 최순우가 저세상에서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을 것 같다. 2000년 뉴욕을 방문하여 수화의 무덤을 그의 타계한 날에 간일이 있었다. 서민적인 수화답게 많은 미국사람들의 무덤과 나란히 누워서 아무 장식도 없이 하늘과 대면하고 있었다. 서민적인 수화를 상징하는 무덤의 분위기였다. 수화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는 그 공동묘지의 동쪽하늘에는 하늘과 땅이 입 맞추며 장대하였다. 수화는 수화다운 무덤에서 고이 잠들어 있었다. 이렇게 멋쟁이 수화는 미국 땅에 묻혔지만 한국의 얼을 지닌 채 최순우와 더불어 우주 공간을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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