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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일곱 빛깔 무지개다리의 추억

최열

절벽 낭떠러지에 아롱진 노을 걷히고     絶壁懸崖捲彩霞

문득 바라본 폭포, 하늘 끝에 걸려 있네   忽看飛瀑掛天涯

물줄기 곧장 바다로 쏟아지고        銀河直瀉滄溟外

신선은 팔월의 배 띄우려네         欲放仙翁八月槎


- 이원진(李元鎭, 1594-1665), <정방연(正方淵)>, 『탐라지』



한라산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흐르는 애이리내[홍로천·동홍천]가 바다에 이르러 땅에서 솟아오른 주상절리(柱狀節理) 층으로 높이 23m의 거대한 바위절벽을 타고 떨어지는 물줄기가 있다. 정방폭포(正方瀑布). 너비 8m에 깊이 5m의 웅대한 규모의 물줄기에 햇빛이 내리쬐는가 하면 일곱 빛깔 무지개다리가 펼쳐진다. 물줄기가 곧장 바다로 쏟아지는 폭포는 동양에서 오직 이곳뿐이라고 해서 더욱 눈길을 끄는데 동쪽으로 가까운 곳 500m 지점에 굴 속 지하수가 솟아나는 소정방 동굴과 높이 5m 물줄기 10개의 폭포까지 있어 말 그대로 해안폭포 제일절경이다.


그림 <정방탐승> 상단엔 다섯 그루의 거대한 소나무를, 왼쪽엔 정방폭포, 하단엔 세 개의 섬을 배치하고 바다 복판엔 춤추는 두 척의 배를 띄워두었다. 이 그림은 폭포를 그린 것이 아니다. 선율을 그린 그림이다. 먼저 왼쪽 폭포줄기가 쏟아져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배 위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가 서로 어울린다. 이것이 다가 아니다. 화폭 전체를 채우는 바다의 물결이 마치 악보와 같은 잔잔한 선율처럼 울고 있고 아래쪽 섬 주위의 물결이 찰랑대는 추임새의 효과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상단의 다섯 그루는 그저 말뚝이 아니라 각자 흔들거리며 춤을 추니 선율에 호응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진시황은 신하 서불(徐市)에게 남녀 3천 명을 주어 불로초를 구해 오라는 임무를 주었다. 탐라를 영주라고 여긴 이들은 정방폭포에 이르러 탄식하여 자신이 왔다 갔음을 기록하고 싶어 알 수 없는 어떤 그림 같은 글자를 바위에 새겼다. 서불이 이 곳을 지나갔다는 뜻으로 서불과차(徐巿過此) 또는 서불과지(徐巿過之)라고 썼다는데 유배 온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어디선가 발견하여 탁본을 떠두었다는 전서(篆書) 글씨 탁본이 전해온다. 그 글자는 20세기 중엽까지 남아 있었다가 그 언젠가 정방폭포 바로 위에 전분공장이 생겼고 그 폐수로 말미암아 사라졌다고 한다.


1951년 봄 화가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이 부인과 두 아들을 데리고 이곳 서귀포로 옮겨왔다. 알자리동산 마을 이장 송태주, 김순복 부부가 사는 집 곁방에 살림집을 마련하고 생활하기 시작한 이중섭은 이곳 풍경을 그렸다. 남쪽으로 끝없는 바다가 보였으므로 화폭에 담았고 이 작품을 9월 부산에서 열리는 전시미술전에 출품했다. 모두 서귀포 풍경이었다. 섶섬, 문섬, 새섬이 담긴 이 작품 말고도 숱한 그림을 그렸고 그 해 12월 부산을 향해 떠나갔다. 이중섭이 그린 섶섬이 투박하고 거친 반면, 김남길이 <정방탐승>에 그린 섶섬은 무척이나 교묘하다.


김남길의 섶섬은 삼도(森島)라고 표기해 둔 화폭 오른쪽 하단 삼각형의 섬인데 허리부터 봉우리를 뾰쪽한 죽순의 숲처럼 묘사하여 사실성도 돋보이지만 독특한 형상 표현이 눈부시다. 섶섬의 용이 되려다 죽은 구렁이 전설은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는 해도 섶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준다. 용왕은 구렁이에게 섶섬과 지귀섬 사이에 숨긴 야광주(夜光珠)를 찾으면 용이 될 것이라 하여 백년 동안 끝없이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서 죽고 말았다. 비가 내리려 할 때면 섬 꼭대기에 구렁이가 뿜어내는 짙은 안개가 피어오르곤 하자 어부들은 섬에 사당을 지어 매달 초여드렛날 제사를 지내 원혼을 달래 주었다. 어부들은 아마도 꿈을 이루지 못한 이들을 위한 진혼곡 타령을 불렀을 게다.


오늘날 정방폭포는 그림에서 보는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어딘지 혼란스럽다. 쏟아지는 물줄기 사이를 잇는 무지개다리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저 아득한 시절, 1948년 4월 3일 이래 섬 전체가 폭풍의 피바람으로 가득 찬 시절, 1949년 3월부터 시작한 정부군의 산악소탕전이며 섬멸작전 과정에서 이곳 정방폭포는 참혹한 학살의 장소였다. 정방폭포를 바라보며 제 아무리 아름다움을 즐기려 해도, 사라진 무지개 다리처럼 내게는 결코 되돌릴 길 없는 기억의 하나가 되고 말았다. 1948년 4.3항쟁이 지속되던 6월 동전(東田) 오기영(吳基永, 1909-?)은 저서 『삼면불』에 발표한 ‘제주도 사태’라는 글에서 ‘흥분한 감정상태’에 빠진 경찰이 ‘적색탄압이란 명목 아래 적색분자를 제조하여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고 당시의 상황을 지적했다. 민간인 학살이라는 야만을 비판했던 것이다. 그 때 절망을 예감했던 오기영은 글 끝에서 다음처럼 절규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제주도 사태는, 지리산 사태는........” 그러나 끝을 이렇게 서글프게 맺을 일은 아니다. 그 냄새 배어 있다고 해서 영주십경(瀛洲十景)의 하나인 정방폭포의 매력이 사라질리 없다. 제주목사로 재직하며 1653년 하멜(Hendrick Hamel, 1630-1692) 일행을 한양으로 압송하였고 또 『탐라지』를 지은 태호(太湖) 이원진(李元鎭, 1594-1665)은 정방폭포에 빠져 신선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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