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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매혹의 깊이, 김남길 화풍

최열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지만 사는 땅이 다르고   天同而地異

같은 땅에 살지만 사는 사람이 다르고        地同而人異

사람은 같지만 사는 시대가 다르다         人同而時異


- 성대중(成大中, 1732-1809), 『청성잡기(靑城雜記)』 제3권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41폭은 김남길(金南吉)의 작품이다. 1702년 3월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부임한 청백리이자 강직한 선비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이 10월 29일부터 11월 20일까지 제주를 순회할 때 함께 다니면서 풍물과 사건을 그리도록 했는데 어느덧 41폭으로 늘어났다. <제주조점>은 한라산이 시원스럽게 보이는 제주관아에서의 행사를 그린 것이다. 지리학에 일가를 이룬 이형상의 의지에 따라 제작한 작품이기에 기록과 설명에 충실한 도해양식(圖解樣式)을 취했던 것이지만 화가의 시선과 해석에 따라 사물의 배치, 형태의 구성, 선묘의 운용을 꾀하여 특별한 조형미를 뿜어낸다.


화가 김남길은 목사의 부름에 따라 수행했으므로 제주목 소속 장인이거나 또는 이형상이 별도로 부른 방외화사(方外畵師)일 것이다. 이러하건 저러하건 육지에서 초빙했을 리는 없으므로 김남길은 제주제일명가로 군림하고 있던 화가였을 것이다. 또 그는 아마도 앞선 시기의 작품 <탐라십경도(耽羅十景圖)>도 그렸을지 모른다.


20세기에 형성된 주류양식의 전형에 익숙한 눈길로 보면 <탐라순력도>의 기법은 미숙하고 어리석은 변방의 속화(俗畵)에 불과할 뿐이다. 나도 흔히 민화라 부르는 민간장식화(民間裝飾畵)에 대한 공부가 부족했을 적엔 그저 흥미를 주는 미숙성 소인화(素人畵)의 하나 일뿐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미술사, 회화사의 가치나 예술성을 평가할만한 작품이 아니라고 여겼던 것이다. 단지 제주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어 기록성을 높이 평가할 수 있을 자료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이런 관점이란게 주류중심주의에 불과할 뿐임을 깨우치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족(士族)의 품평기준과 민간의 취향기준이 서로 다르고 보니 중앙과 변방이 나뉘고, 정통과 이단이 갈라지는 것일 뿐이므로 어느 한쪽을 우월하다 다툴 일은 아니다. 문득 서자 출신의 한 지식인이 일러 준 바 그 차이란게 서로 다른 것일 뿐이라는 그 변방 사람의 말을 들려줄 수 밖에.


“무엇을 가지고 땅은 같은데 사람이 다르다고 하는가. 땅은 만물을 생성할 뿐이니 해와 달이 비춰주고 서리와 이슬이 내려 곤충과 초목을 모두 길러 주는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이겠는가. 오랑캐니 중국이니 하는 것은 사람들이 구분하는 것이지 땅이 어찌 차별함이 있겠는가.”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이 『청성잡기(靑城雜記)』에 써 둔 말이다. 또 성대중은 오랑캐와 중화(中華)의 구분은 사람이 한 것일 뿐, “모든 땅은 똑 같은 하늘아래 있다”고 하고서 “하늘의 입장에서 볼 적에는 중국과 이적이 어찌 차별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천지 사이에 중심과 주변을 가르는 세계관을 부정했다. 그러나 집권세력에게 제주도는 변방이었고 한양의 풍습을 배워야 할 계몽의 대상이자 억압해야 복종시킬 수 있는 야만의 땅이었다. 이러한 관점을 받아들인 20세기 미술사학자들은 변방화가들이 한양의 세련된 회화기술을 배우지 못해 기교가 미숙하고 따라서 양식도 낙후할 수 밖에 없어 이런 기이한 형상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규정하곤 했다. 누군가는 “도식성과 인습성이 현저하다”거나 또 누군가는 “지방화공이 그려 격조가 낮다”고 폄훼하면서 심지어 ‘구도, 수지(樹枝), 인물 표현 같은 기교 분석은 의미가 없다ʼ고까지 과격하게 발언하고 있지만 오랑캐와 중화의 차별을 만든 게 사람이요, 하늘과 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성대중의 말대로 회화 양식에 관한 차별도 저 누군가가 만든 것일 뿐 미술 자체가 그런 건 아닐 것이다.


<탐라순력도>는 탄생하자 곧바로 제주를 떠나 300년 동안 육지에 머물다가 1998년 말 귀향했다. 제주시가 3억원에 구입, 소장하고서 국립제주박물관에 위탁해 탐라순력도실을 따로 마련해 관람을 쉽게 하였다. 이 작품은 오랜 세월 이형상의 종가(宗家)에 보존해 오다가 1979년에 국가가 보물 제652호로 지정했고 그 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이형상의 제주박물지인 <남환박물(南宦博物)>까지 합쳐 영인본을 제작했다. 그러다가 1992년 제주대학교박물관에서 전시한 뒤 도록 『제주문물전』에 그림 일부를 게재했고 1994년 제주시가 온전하고 화질 좋은 영인본을 제작해 2008년까지 6판을 거듭해 보급해 오고 있어 쉽게 구해 볼 수 있어 좋다. <탐라순력도>는 지금 나를 매혹하는 화풍이요, 내가 조선미술사를 서술한다면 17세기 초 걸작으로 한 장을 따로 마련하겠다. 그렇게 하려면 또 하나의 화풍 계보를 설정해서 여러 가지 계보로 나누어야 하겠지만 그 수고로움이야 거둘 수 있는 열매를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중심과 주변의 구도를 해체하고 다원 구도를 마련한다는 것은 공동체 모두에게 매혹에 넘치는 행복일 터인데 아마도 성대중이 이 말을 듣는다면 무척 기뻐할 것임이 분명하다. 성대중은 모습과 언어, 복식과 습성, 풍토와 가치관이 다름을 말하면서 다음처럼 천명하였던 것이다.



* 지금껏 한양 일대를 그린 그림을 다루었다. 이번부터는 조선 팔도 전역을 다양하게 유람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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