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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천년왕국의 꿈, 북한산의 울음

최열

자웅을 가리진 못해도 효조로 이름났지    雌雄莫辨孝爲名

사랑스럽구나 새들의 안 갚음 소리      可愛禽中反哺聲

하늘과 사람 모두 다 영물이라 이르지    天上人間靈物謂

칠석이면 다리 놓고 견우직녀 맞는구나    雙星七月作橋迎


- 최산두, <까마귀 울음[詠烏]>, 『신재집(新齋集)』


*안 갚음[反哺]: 자란 새가 늙은 어미새에게 먹이를 물어다 줌.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가 북한산의 주봉인 백운봉(白雲峯)에 올랐다. 참을 수 없는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솟구쳐 오르자 이렇게 노래했다. “손 당겨 덩쿨 잡고 푸른 봉우리 오르니[引手攀蘿上碧峯] 암자 한 채 흰 구름 속 높이 누워있네[一庵高臥白雲中]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 내 땅으로 이룬다면[若將眼界爲吾土] 초나라 월나라 강남을 어찌 받아들이지 않을텐가[楚越江南豈不容]”


그리하여 신하들이 『동국여지승람』에서 천년왕국을 꿈꾼 대왕의 도읍 서울을 칭송한 바처럼 “하늘의 밝은 명령을 받고 여기에 도읍을 정하여, 사방에서 조정(朝廷)으로 오는 길을 고르게 하고, 만세(萬世)에 빼지 못할 큰 터를 세우니, 동경 경주, 서경 평양, 개경 개성이라 저들 삼경(三京)의 형세로서는, 그 만분의 일도 여기에 방불할 수 없는 것이니, 아름답고 훌륭하여라”라고 노래하였던 것이다. 그렇다.


스물여덟 청년시절 1983년 10월이었다. 북한산 아래 응봉(鷹峯) 기슭 창경궁과 성균관 사이 길가 집에 정착했다. 잠시 백제의 수도 터였던 암사동 쪽에도 살았지만 1997년 9월부터는 아예 북한산 평창동부로 아침저녁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세월 동안 혈연이며 지연, 학연 하나 없던 나를 품어 지켜준 힘은 분명 “용이 서리고 범이 걸터앉은 형세”를 갖춘 북한산에서 토해내는 기운이었을 것이지만 못다 이룬 개혁의 꿈 안고 떠나신 내 시조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 1483-1536) 어른이 주신 힘일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내가 그 뜻 품고 상경하던 무렵, 뜻있는 이들이 백운봉에 박혀있던 쇠말뚝을 뽑아냈는데 짓눌리던 정기가 다시 샘솟아 놓아준 견우직녀(牽牛織女)의 오작교(烏鵲橋)에 흩뿌리던 구름이었는지도 모른다. 태어나 저토록 아름답고 장대한 산세 또 어디서 마주할 수 있을까. 늘 묻곤 한다. 그렇게 내 것으로 만들어 이렇게 살아 왔지만 이 곳 거쳐 간 그 수도 없을 인물들이며, 거기 그렇게 살아가는 수목이며, 짐승 또한 나와 같았을까. 이중환(李重煥, 1680-1752)은 『택리지(擇里志)』에 기세를 도와주는 옆 산도 없이 오직 홀로 우뚝 선 북한산을 다음처럼 묘사했다.


“삼각산은 도봉산과 연달아 얽힌 산세이다. 돌 봉우리가 한껏 맑고 수려하여, 만줄기 불이 하늘에 오르는 것 같고, 특별하게 이상한 기운이 있어서 그림으로 나타내기 어렵다.”


이어서 이중환은 개성의 송악산(松嶽山)에 비교해 살기(殺氣)가 있어 송악산만 못하다고 하고서 그나마 “미더운 바는 다만 남산(南山) 한 가닥이 강을 거슬러서 판국을 만든 것이다. 수구(水口)가 낮고 텅 비었으며, 앞 쪽에 관악산(冠岳山)이 강을 사이에 두고 있으나, 또한 너무 가깝다. 비록 화성(火星)이 앞을 받치고 있긴 하지만, 풍수 하는 이들은 항상 정남방(正南方)으로 자리 잡는 것을 좋지 못하다”고 했는데 실제로 불을 뿜는 관악산에 맞서 물을 뿜는 해태를 광화문 양쪽에 나란히 세워두어 경계하였던 것이다. 어쩌면 이중환은 한양을 싫어했는지도 모르겠다. 병조정랑(兵曹正郞) 벼슬을 끝으로 1725년 구속당해 네 차례의 형을 받고 1726년 연이어 두 차례나 유배를 당한 뒤 세상을 유랑하는 30여 년 나그네의 삶을 살았던 그였으니 말이다. 위대한 스승 이익(李瀷, 1681-1763)의 제자로서 계급의 특권을 부정하는 사상의 소유자였던 이중환은 그러므로 권력의 중심 한양을 품은 북한산에 대해 이말 저말 다른 말을 뒤섞어 두었다.


“그러나 판국 안이 명랑하고 흙이 깨끗하여, 길에 밥을 떨어뜨렸더라도 다시 주워서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까닭에 한양의 인사가 막히지 않고 명랑한 점이 많다. 하지만 웅걸(雄傑)한 기상(氣象)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


누가 그렸는지 모르지만 이중환이 택리지를 쓰던 1751년도 한참 지난 1780년대에 제작한 <도성도>의 부분인 <북한산> 모습은 황홀하리만치 눈부시다. 오른쪽 백운봉을 정점으로 인수봉과 노적봉이 우람하게 모여 삼각산의 형세를 이루고 서쪽으로 보현봉, 문수봉에 비봉까지 흐르는 원경(遠境) 아래로 시가지와 경계를 이루는 나무들의 행렬이 활력을 불러일으킨다. 그 이상한 기운 탓에 그림으로 나타내기 어렵다고 한 이중환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굴곡진 산악의 우람함을 화려한 필치로 묘사하는데 성공한 이 화가는 대체 누구일까. 연구자 가운데 정선(鄭敾, 1676-1759)의 후예가 그렸을 것이라고 짐작하곤 하는데 구도나 붓놀림의 섬세함만 보더라도 이 그림은 정조의 총애를 받던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나 그 동료의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누구의 것이면 어떠하랴. 북한산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알려주면 그만이라, 화가는 그렇게 여겼을 터인데.


지금으로부터 오백년 전인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 1482-1519), 양팽손(梁彭孫, 1488-1545), 기준(奇遵, 1492-1521)과 더불어 기묘사학사(己卯四學士)의 일원이었던 최산두 어른이 홍문관에 재직하던 시절, 북한산에 올라 마주친 까마귀 울음소리 듣고 읊었을 아름다운 노래, 오작교 어귀에 이를 때면 산 울음소리처럼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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