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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종묘, 그 두려운 아름다움

최열

빛나는 바람은 푸른 물결 위 떠돌고 

난초는 나날이 일어나고 일어나네 


- 민영환, <괴석죽도(怪石竹圖)> 제화시


*둘째 연은 주 문공의 난간(蘭澗)에 대한 절구이다.

 蘭杜는 난초와 두약(杜若)으로 향초의 이름인데, 흔히 사람의 아름다운 자질에 비유함.



어린 시절 창경원(昌慶苑)에서 노닐었고 대학 졸업 뒤 상경하여 성균관대 옆 명륜동에 거처를 마련하고 안국동이며 인사동을 드나들 때면 창덕궁과 종묘를 나누어 가로지르는 율곡로(栗谷路)를 걸어 다니곤 했다. 그때만 해도 저 율곡로가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줄 알았다. 하지만 그 길이 1932년 무렵 언젠가 궁궐을 가로질러 새로 낸 도로이며 율곡로란 이름도 1966년에 행정부가 가져다 붙인 것으로 저 위대한 사상가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와 아무런 인연도 없는 출처불명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적부터는 왕의 잘린 몸 속을 헤집는 신하의 방자함을 따르는 것만 같아 걸음걸이가 편치 않았다.


종묘(宗廟)는 조선 왕실의 종통(宗統)을 상징하는 사당이다. 창경원도 꽃놀이 즐기는 무슨 원(苑)이 아니라 엄연한 궁(宮)으로 제 이름은 창경궁이었다. 오백년 왕국의 궁궐인 저 창경궁, 창덕궁(昌德宮) 남쪽으로 양지 바른 터전에 뻗어 내린 종묘 사이를 칼로 베듯 갈라버려 혈맥을 절단시킨 자는 다름 아닌 조선총독부였다. 더욱이 1592년 5월 8일 임진왜란 왜군(倭軍)선봉장 우키다(浮田秀家)가 입성해 종묘를 병영으로 삼았는데 사병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가자 종묘에 모신 조선왕의 신령이 징벌하는 괴변이라 두려워하여 이곳 건물을 모두 불살라 버렸다. 그로부터 300여 년이 지난 뒤 또 다시 저렇게 절단해버렸으니 몰랐으면 모를까 그 사실을 알고서부터는 율곡 선생에게 미안할 뿐이다.


태조 이성계는 1394년 11월 10일 종묘 건축에 쓸 목재를 저 용산강(龍山江)으로 나아가 몸소 살펴보고, 12월 3일에는 황천후토(皇天后土)와 산천제신(山川諸神)에게, 다음 날 오방지기(五方地祇)에게 궁궐과 종묘를 짓겠다 아뢰고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이 때도 궁궐을 마다한 채 종묘 건설현장을 찾아 몸소 참관하였다. 1395년 9월 완공하자 개성으로부터 선조 4대의 신위(神位)를 옮겨와 윤 9월 28일 종묘에 봉안하였다. 10월 5일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종로에 이르자 성균관 박사와 학생이 “하늘의 보살핌이여[天監] 아름답구나 명을 받았으니[美受命也] 화산이여[華山] 아름답구나 새 도읍이라[美定都也] 새 종묘여[新廟] 아름답구나 종묘 세워 제사 올리네 [美立廟親祀也]”라는 가요를 바쳐 올렸다.


이성계는 교서(敎書)에서 종묘야 말로 나라의 근본이라 했는데 종묘와 더불어 환구단과 사직단(社稷壇) 또한 왕국의 근본이었다. 그러므로 궁궐의 동쪽에 왕실의 종묘, 서쪽에 국토의 사직단, 남쪽에 천제(天帝)의 환구단을 배치하여 군주와 백성, 하늘이 조화로운 터전을 마련했던게다. 환구단은 천황대제(天皇大帝)와 청황적백흑(靑黃赤白黑)의 오방오제(五方五帝)의 신위를 봉안하고 기곡제(祈穀祭),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단이었으며, 사직단은 두 개의 단으로 사단(社壇)은 땅을 주재하는 토신(土神), 직단(稷檀)은 곡식을 주재하는 곡신(穀神)을 제사하는 단이었다.


이들 묘(廟)와 단(壇)은 궁궐은 아니지만 국가가 설치, 운영하는 장소로, 신성한 곳이었으며, 통치의 권위와 백성의 풍요, 사회의 안위를 희망하는 이념의 장치였다. 56,500여 평이나 되는 넓은 땅에 자리한 종묘는 옆으로 기나긴 건물 정전(正殿)이 있고 그 앞에 공신당(功臣堂)이 있으며 공신당 옆에 재궁(齋宮) 그리고 서쪽으로 별전인 영녕전(永寧殿)이 자리하고 있다. 정전에는 태조에서 순종까지 열아홉 왕과 왕비를, 영녕전에는 그 밖의 태조에 앞선 추존왕과 왕비 그리고 영친왕까지를 모셔두었다. 그곳에서 64명의 팔일무(八佾舞)와 만년무(萬年舞)가 불꽃도 휘황한 깊은 밤을 수놓을 때 펼쳐지는 700명 규모의 제사가 화려하기 그지없지만 무엇보다도 옆으로 하염없이 길게 뻗어나간 본전과 영녕전 건물이 눈부시다. 그 아름다움은 지평선처럼 낮게 깔려 숨 쉬는 지하의 혼령과 끝도 가도 없을 천년왕국의 기세가 금세 살아날 것만 같은 두려움을 간직한 자태 그대로다. 지하와 지상, 천하와 천상, 자연과 인공의 기운이 어우러진 건축 미학의 절정은 이런 생김을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지금, 잘린 몸통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신하의 이름으로 더럽혀져 불경스럽지만 본시 종묘는 공훈을 세운 신하를 군주와 짝 지워 별채인 공신당에 배향(配享)함으로써 군신이 서로 외롭지 않도록 배려한 장소였다. 역대 군주가 그랬듯이 고종도 박규수(朴珪壽, 1809-1877), 신응조(申應朝, 1804-1899), 이돈우(李敦宇, 1801-1884),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을 공신당에 거느렸다. 어찌 이들만이 고종의 신하였을까만 저 민영환이야말로 고종의 참된 신하였다. 1905년 11월 30일 대한제국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이 할복 자결했다.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된지 13일째 되는 날이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고종황제를 협박하는 가운데 통감정치 실시와 외교권을 박탈하는 내용의 이 늑약은 대한제국을 반식민지화하는 것이었다. 자결한 집에서 자라난 혈죽(血竹)은 전설이 되었고 민영환이란 이름은 신화가 되었다. 그래서 요즘 율곡로를 지날 때면 민영환이 스스로 그린 그림 위에 써둔 제화시를 읊조리며 회상에 잠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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