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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규장각, 문예성세의 산실

최열

강물은 바람 없이 거울처럼 맑은데     江水無風鏡面淸

그 누가 뱃노래 소리를 알아들을까     誰人解聽棹歌聲

갈대꽃 작은 언덕에 가을 경치 옅은데   蘆花小岸秋光淺

한 빛깔 먼 하늘에 저녁놀이 나오는구나  一色遙天晩靄生


- 정조, <제화선(題畵扇)>, 『춘저록(春邸錄)』 1권



김홍도가 그린 <규장각(奎章閣)> 그림 복판 2층 건물은 주합루(宙合樓)다. 세분하면 아래층은 내각(內閣)이라고 부른 관청 규장각이고 윗 층이 주합루다. 곁에 바짝 붙어 옆으로 길게 늘어선 건물은 서향각(書香閣), 앞으로 내려와 춘당지(春塘池)가 있고 연못 가운데 부용정(芙蓉亭)이, 그 옆 모서리에 선 건물이 영화당(暎花堂)이다. 주합루 뒷 담벼락 넘어 소나무 숲이 에워싸고 그 너머 안개 낀 숲을 건너면 삼각으로 응봉(鷹峰)이 우뚝 솟아있다. 응봉 곁에 뽀쪽한 삼각산 봉우리가 살짝 보이는데 그 줄기가 남으로 내려와 서쪽으로 뻗어 백악산을 이루고 동으로 흘러 응봉이 되었으며 다시 천도를 강행한 태종(太宗)은 이 곳 응봉 아래 터를 잡고 또 하나의 궁궐 창덕궁을 세웠다. 나라를 세운 아버지 태조(太祖)가 저 백악산 아래 경복궁인 서궐(西闕)을 지었으니 그에 대응해 자신은 이 응봉 아래 창덕궁인 동궐(東闕)을 지었던 것일 게다. 감히 아버지에 맞서는 교만함이 그와 같았으나 이로써 천년왕조를 이끌 심장부가 동서 양쪽 날개로 규모를 갖추었음이다.


단종(端宗)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된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世祖)는 집현전(集賢殿)의 빼어난 학자 양성지(梁誠之, 1415-1482)로부터 1463년 5월 30일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다. “동쪽에 별실을 지어 어제시문(御製詩文)을 봉안할 규장각을 두소서” 그렇게 세월이 흘러 숙종(肅宗)이 그 뜻을 실현했다. 하지만 그 때도 여전히 어제박물관이었을 뿐이다.


정조(正祖)는 즉위한 1776년 3월 춘당대(春塘臺)에 건물을 짓게 하고 9월 25일 준공하여 그 건물에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다음 해인 1777년 정조는 「규장각」이란 글에서 자신은 왕이 됨에 “문치와 교화를 진흥하는 것을 우선의 책무로 삼아 궁중에 규장각을 설치하였으니 우리 동방 예악의 근본이 여기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정조는 규장각을 어제시문 보관만이 아니라 인재를 관원으로 임명하고 교육시키며 학문과 정책을 토론하고 서적을 편찬하는 학문의 전당으로 육성해 나갔다. 무엇보다 정조는 규장각 학사(學士)를 우대하면서 신뢰할 수 있는 측근세력으로 성장시켜 나갔던 것인데 1781년 2월에는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를 만들어 16명을 선발하였으므로 1782년 한 신하가 ‛규장각은 정조의 사각(私閣)이요, 그 학사는 정조의 사신(私臣)ʼ이라고 비판하고 나섰을만큼 규장각은 말 그대로 정조친위세력의 본거지였던 것이다.


실제로 규장각의 규(奎)는 문운(文運)을 관장하는 별 규정(奎星)이며 여기에 문장을 뜻하는 장(章)을 합쳤으니 규장이란 왕의 문장이란 뜻이다. 저 세종의 왕립 한림원(翰林院, royal academy)을 집현전이라 한다면 정조의 왕립 한림원은 규장각이었던 것이다. 정조는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유득공(柳得恭, 1749-1807),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서이수(徐理修, 18세기)와 같은 규장각 사검서(四檢書)를 배출한데서 보듯 서얼(庶孼)까지 포괄하여 친위세력을 폭넓게 확장해 나갔고 실로 명예로운 준사들이 등용의 반열에 늘어 서있게 해야 할 것이란 뜻 그대로 영민하고 유능한 인재를 끝없이 배출하였다. 정조 재위 마지막 해이자 규장각 창립 24주년인 1800년 4월 11일에 선발한 21명의 초계문신 가운데 19세기 전반기 사단종장(詞壇宗匠)이자 사단맹주 신위(申緯, 1769-1847)와 학술의 양대 산맥을 이룬 대학자 홍석주(洪奭周, 1774-1842), 김매순(金邁淳, 1776-1840)이 포함된 데서 보듯 규장각은 세월이 흐를수록 눈부신 학술기관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규장각은 정조 시대 지식인의 요람이었다. 서얼 출신 이덕무가 잡직(雜職)인 검서관(檢書官)으로 발탁되자 감격하여 ‘아득한 푸른 하늘 모두가 학을 타고 자주빛 기운 분분한데 다들 소를 타고 영주산(瀛洲山) 신선 되어 옥안(玉案)에 조회(朝會)하였다’고 노래하였고 또한 중인 신분인 박윤묵(朴允默, 1771-1851)은 『존재집(存齋集)』 「우로첩서(雨露帖序)」에 규장각에서 정조와의 인연에 못내 감격해 하였다. 그 사연은 이러하다. 1792년 정조가 각신(閣臣)은 물론 각리(閣吏)들에게 하사품을 내렸다. 검서관 보다 아래 신분으로 최하층 관리인 70여명의 이속(吏屬)에게 물품을 하사한데 그치지 않고 정조는 이들에게 사호(司戶)라는 칭호를 특별히 지어 주었다. 놀라운 충격에 이들은 서영보(徐榮輔, 1759-1816)에게 부탁해 ‛내각사호(內閣司戶)’란 현판 글씨를 얻어 근무처에 걸어두었던 것이다. 이 때 박윤묵과 함께 사호 칭호를 받은 이속으로 화가 임득명(林得明, 1767-1822), 시인 김낙서(金洛瑞, 1757-1819무렵)가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규장각도>를 그린 김홍도와 더불어 옥계시사 맹원들이기도 했다. 박윤묵은 그 감동의 물결을 “사호(司戶)란 이름을 내리시며 아패(牙牌)를 받들도록 허락하셨으므로 궁궐에서 분주히 다니며 금원(禁苑)에 출입했던 것이니 분수를 넘은 영광이 너무도 컸다.”고 기록해 두었다. 정조는 그렇게 베풀던 인간이었다. 어쩌면 규장각 관원 모두에게 나눠준 하사품인지도 모를 선면화(扇面畵)에 세손(世孫) 시절 읊조렸던 제화시(題畵詩)를 되풀이 썼을까. 그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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