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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사대와 자주의 경계, 대보단

최열

하나하나 헤아려보면 누가 영웅이란 말인가   點閱英雄誰得算

화이(華夷)의 나뉨은 하늘에 달렸지          剪裁夷夏摠由天

금원(金元) 후손들은 성쇠(盛衰)를 다투며      金元餘孼爭衰盛

압주(狎主)가 중원을 차지한 지 몇 해던가     狎主皇圖定幾年


- 김창흡, <도경흥등망덕정(到慶興登望德亭)>, 『삼연집(三淵集)』



태조 이성계는 새나라 조선의 법궁(法宮)으로 경복궁(景福宮)을 건립했을 뿐, 지금 창덕궁(昌德宮)을 세울 수 있던 시간이 없었다.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는 일만으로도 벅찼던 것이다. 반대를 무릅쓰고 다시 천도를 강행한 3대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은 이궁(離宮)으로 창덕궁을 창건했다. 1405년 10월 향교동(鄕校洞)에 궁궐을 완성하고 그 이름을 창덕궁으로 명명하였다. 처음엔 규모가 작았는데 태종은 재위할 때 틈틈이 누각을 추가해 비로소 오늘의 창덕궁이 탄생했다. 그러니까 경복궁은 태조의 궁궐이요, 창덕궁은 태종의 궁궐이라 할 수 있겠다.


창덕궁은 세 차례 소멸했다가 다시 태어났다. 처음엔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군대가 경복궁과 더불어 파괴, 방화해 버렸고 1623년 인조정변 때 인정전(仁政殿)을 비롯한 몇 채의 건물만 남았을 뿐 모두 파괴, 방화당하고 말았다. 외적이 파괴했을 때는 광해(光海)가 재건하였고, 내란으로 소실 당했을 때는 정변을 일으킨 인조(仁祖)가 재건하였다. 그로부터 210년 동안은 무사했으나 1833년 또 한 번 대규모 화재가 일어났고 다음 해 재건하였다.


창덕궁은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을 대신하는 조선의 법궁(法宮)이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말들이 제법 상당했다. 경복궁은 왜란을 겪고 보니 불길하다던 풍수가 고스란히 사실이고, 창덕궁은 단종(端宗)과 연산(燕山)이 폐출 당한 궁궐로 두 왕이 참담한 최후를 맞이했던 흉궁(凶宮)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왜란 직후 경복궁 대신 창덕궁을 재건한 광해가 창덕궁을 마땅치 않게 여기고서 인왕길자(仁王吉字)라는 풍수음양(風水陰陽)에 따라 인왕산 아래 인경궁(仁慶宮)을 창건해 법궁으로 삼고자 했지만 창덕궁에서 머물다가 끝내 정변을 겪어 폐출 당하고 보니 실로 창덕궁 또한 경복궁 못지않은 흉궁이었던 게다. 하지만 인조 이후 이백년의 태평세월과 18세기 영조와 정조 시대의 문예성세(文藝盛世)를 누렸으므로 창덕궁 풍수의 수명은 이백년인 셈이었다.


순조(純祖)는 화재를 예감했던 것일까. 도화서 화원으로 하여금 창경궁 전경을 완벽에 가까울만큼 정밀하게 묘사하도록 명령하여 1828년에서 1830년 사이에 저 거대한 규모의 <동궐도(東闕圖)>를 완성하였다. 봄날의 싱그러운 기운을 가득 품고서 경사진 땅의 결을 따라 좌우로 활짝 나래를 편 채 평행과 사선을 교차시킴으로써 안정감과 율동감이 조화로운 구도가 눈부신 작품이다. 또한 비단 바탕에 고운 물감을 가는 붓으로 찍어 촘촘하기 그지없이 묘사하는 정밀한 화풍이며, 사선으로 비탈진 땅을 파헤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두고서 건물과 도로를 배치하여 자연과 인공의 완전한 조화를 이룩한 공간 구성을 완벽하게 재현한 사실성 그리고 지도와 회화를 합쳐 하나의 소우주를 연상케 하는 일종의 환상(幻想)과도 같은 이상성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정지와 운동, 안정과 율동, 자연과 인공, 사실과 이상, 평행과 사선, 지도와 회화의 모든 것을 융합시킨 이 <동궐도>는 19세기 궁중 회화가 탄생시킨 최대의 걸작이다.


대보단(大報壇)은 1704년 창덕궁 서북쪽 별대영(別隊營) 창고 자리에 설치한 단(壇)이다. 이미 사라져버린 왕조인 명나라 신종(神宗) 제사를 지내는 자리로 1907년부터 폐지하였고 1921년에는 이곳에 선원전(璿源殿)을 지어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그림의 대보단은 주위 담장 안쪽 바닥에 가지런한 박석(薄石)이 무척이나 아름다운데 배경을 이루는 산 또한 그 묘사가 어지러우리만큼 현란하다. 어찌 저토록 강렬할까. 큰 은혜에 보답한다는 대보단은 또 황단(皇壇)이라고도 불렀는데 처음엔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파병한 명나라 두 황제를 제사지내고자 했던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꿈꾸었던 제단이었다. 그 제자들이 1704년 1월 화양동(華陽洞)에서 두 황제 신위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던 것을 숙종(肅宗)이 궁궐에 받아들여 12월에 이와 같은 황단을 설치하고서 제사를 지냈으니 명나라 황제 제사는 이제 조선의 제사가 되었던 것이다.


현존하는 청나라를 오랑캐라며 멸시하고 지상에서 사라진 명나라를 중화(中華)라며 기리는 마음은, 구원자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하는 뜻이 담긴 가상함이요, 그 중화의 정통성이 조선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하여 오랑캐 청나라에 대한 소중화(小中華) 조선의 주체성을 구현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지만, 명나라에 대한 사대(事大)의 본질을 부정하고 있지 않는 한, 조선 고유의 문명을 표방하는 자주성의 천명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북벌론(北伐論)에 익숙한 가문 출신의 위대한 시인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이 1716년 2월 함흥(咸興)을 거쳐 백두산(白頭山) 넘어 장백산(長白山) 가까이 북관(北關) 일대를 여행했다. 러시아와의 국경 도시인 경흥(慶興) 땅에 이르렀을 때 느꼈을 저 사대와 자주의 경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 노래 듣노라면 그저 경계에 선 지식인의 고뇌가 저절로 흐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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