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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매봉 아래 옥수동 독서당

최열

독서당에서 밤 깊도록 잠 못 이루니     湖堂久不寐

밤기운 품안에 맑게 스며드네       夜氣著人淸

나뭇잎 떨어져 가을 가는 줄 알겠고   葉盡知秋老

강물 환해 뜨는 달 보는 구나       江明見月生


- 이이(李珥), <호당야좌(湖堂夜坐)>, 『율곡집(栗谷集)』



학문을 즐기던 군주 세종(世宗)은 1426년 12월 사가독서(賜暇讀書) 제도를 시행하도록 집현전(集賢殿) 대제학(大提學) 변계량(卞季良, 1396-1430)에게 명령하였다. 집현전 학사(學士) 가운데 재능과 덕망이 넘치는 권채(權採, 1399-1438), 남수문(南秀文, 1408-1443), 신석견(辛石堅) 세 사람을 선발하여 지금 세검정(洗劍亭) 윗 쪽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장의사(藏義寺)에서 공부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것이 독서당(讀書堂)의 처음이었다.


이렇게 사가독서의 은혜를 입은 이들은 뒷날 큰 업적을 쌓았는데 1438년 권채는 동료와 함께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저술하였고 남수문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초고를 저술하였다. 하지만 세조(世祖)는 집현전 학사들을 싫어하였던지 사가독서 제도를 폐지해버렸는데 성종(成宗)이 다시금 복구했다. 1474년 4월부터 그 논의를 시작하여 1476년 6월 14일 의정부(議政府)에서 채수(蔡壽, 1449-1515), 권건(權健, 1458-1501), 허침(許琛, 1444-1505), 유호인(兪好仁, 1445-1494), 조위(曹偉, 1454-1503), 양희지(楊稀枝, 1439-1504)를 선발하고 27일에는 몇 가지 규정을 정하였다. 무엇보다도 성 안 번화가인 여염(閭閻)이 아니라 고요한 산사(山寺)에서 독서하도록 하였는데 1481년 용산(龍山)에 있던 폐사(廢寺)를 수리하여 호당(湖堂)이라고 부르는 독서당을 설치한 조치는 학문에 전념하라는 뜻이 담긴 것이었다. 1491년 8월 21일에는 홍문관(弘文館) 관원에게도 별도로 집을 지어 사가독서 하도록 하였으며 연산(燕山) 시대에도 사가독서 제도를 지속하였는데 독서당 건물을 사람들이 ‘옛 홍문관’이라 하므로 1505년 11월 4일 이를 금지시켰다.


중종(中宗)은 즉위 직후인 12월 정업원(淨業院)에서 사가독서를 시행케 하고 노비 열 명을 독서당에 배정하여 그 경영을 강화하였다. 정업원은 동대문(東大門) 밖 동망봉(東望峯) 아래 연미정동(燕尾汀洞)에 있었는데 단종(端宗) 왕비 정순왕후(定順王后)가 궁궐에서 물러나 머물던 건물이었다. 정순왕후가 이곳에서 봉우리에 올라 동쪽을 향해 단종이 있는 강원도 영월(寧越) 땅을 바라보곤 했는데 그래서였는지 다음 해 1510년 1월 19일에 정업원이 독서당으로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두모포(豆毛浦) 월송암(月松庵) 근처에 집을 새로 지어 독서당으로 삼는 조치를 취하였다. 두모포는 지금 성동구 옥수동(玉水洞)에 있는 나루터로 동쪽에서 오는 한강과 북쪽에서 오는 중랑천 두 물이 합치는 곳이므로 두물개라 불렀던 물가였다. 옥수동에서 약수동(藥水洞)으로 건너가는 고개가 있었는데 고개 아래 독서당이 있었으므로 이 고개를 독서당고개라 하였었다. 이곳 두모포는 뒤로는 높은 산이 솟아 좌우로 둘러싸고, 앞으로는 동호(東湖)라 부르는 한강이 흘러 그 풍광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거북바위며 투구바위, 너럭바위, 칼바위, 형제바위가 즐비하고, 달맞이봉에 바람맞은고개며 진등고개가 독서당고개와 더불어 얽혀 있는데다가 한양에서 으뜸가는 우물도 있고 또 위장병에 특효라는 약수도 솟구치는 땅이라 옥같은 물이란 뜻의 옥수동이란 이름을 갖추었던 것이다. 그래서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의 하나인 동빙고(東庫)를 설치했었던 게다.


또 이곳 옥수동엔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졌으되 1506년에 연산이 창건한 황화정(皇華亭), 제안대군(齊安大君, 1466-1525)의 정자인 유하정(流霞亭), 김안로(金安老, 1481-1537)의 보락당(保樂堂), 정유길(鄭惟吉, 1515-1588)의 몽뢰정(夢賚亭), 조만영(趙萬永, 1776-1846)의 쌍호정(雙虎亭) 같은 누정(樓亭) 문화가 끝없이 이어졌던 땅이었다. 공부도 유희와 같아 명승지에서 하라 했던 것일까.


<독서당 계회도>는 지난 날 사가독서를 하였던 인물이 한 자리에 모여 지난날의 추억을 되새기는 모임을 기념해 그린 기록화로 1567년 참가자 이이(李珥, 1536-1584), 정철(鄭澈, 1536-1593), 윤근수(尹根壽, 1537 -1616), 1570년 참가자 류성룡(柳成龍, 1542-1607)과 같은 인물들이 참가하였다. 기록화라고는 해도 왕이 매를 놓아 사냥하여 큰매봉이라 불렀던 응봉(鷹峯)을 왼쪽 끝에 솟구칠 듯 배치하고 고개 아래 독서당 앞쪽 아래로 몇 척의 배가 떠도는 호수인 동호를 그려 깊은 맛이 우러나는 한 폭의 산수화다. 꿈틀대는 산줄기가 구비 구비 오른쪽으로 쏟아 내리는 모습이 가파르긴 해도 아래쪽 물줄기가 한가로워서인지 여유마저 갖추고 있다. 이 그림은 한강 건너 남쪽 압구정(狎鷗亭)에서 바라본 풍경이라지만 산 흐름으로 미루어 지금은 사라져버린 저자도(楮子島)에서 바라본 풍경이 아닌가 싶다. 그 풍경 깊고 또 깊어 저 독서당에서 1569년 늦가을 잠 못 이루던 약관 33살의 율곡(栗谷) 이이가 서글픈 마음으로 부르던 노래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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