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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남대문 밖 연꽃 핀 남지(南池)

최열

봄 뒤에 남은 차가운 비 온 뒤 더욱 춥고     春後餘寒雨後增

작은 못가 신록들 살얼음 달고 있지         小塘新綠帶輕

일만 개 붉은 실 가닥 빈 창에 비치는 새벽노을   紅霞萬縷虛窓曙

안개 저쪽 맑게 갠 산 위 해가 솟구치네       煙外晴峯旭日昇


- 장유, <맑게 갠 날 새벽[晴曉]>, 『계곡집(谿谷集)』 제33권



먼지와 진흙으로 가득한 세상에서도 더럽힘으로 물들지 않는 꽃. 연꽃의 그 맑고 깨끗함[淸淨]이 눈부시다. 시서화 삼절로 이름 높던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은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꽃과 나무의 구품(九品)을 논하면서 연꽃을 매화·국화·대나무와 나란히 일등(一等)의 자리에 배치하였다. 높고 뛰어난 운치를 갖춘 까닭인데 매화를 고우(古友) 또는 기우(奇友), 국화를 일우(逸友), 대나무를 청우(淸友) 또는 차군(此君)이라 하였고 연꽃은 정우(淨友)라 하였다. 매국죽 모두 각기 빛나지만 강희안은 연꽃이야말로 훈훈한 봄볕과 함께 부는 바람이라 강호(江湖)에 뛰어나 이름 구함을 즐기지 않으나 저절로 그 이름 감추기 어려운 존재라고 하였다. 숨어 살아도 비 개인 맑은 하늘의 달빛이 되어 눈부신 제 모습 드러내니 그 이름이 바로 연꽃이라, 부처와 보살이 모두 연꽃 위에 자리[蓮華座]하고 있음이며 선비가 연꽃을 사랑하는 데는 그 고요함과 맑음이 함께 하고 있음에서였다.


1629년 6월 5일 홍첨추(洪僉樞)라는 사람 집에 이호민(李好閔, 1553-1634), 이귀(李貴, 1557-1633), 이권(李勸, 1555-1635), 윤동로(尹東老, 1550-1635), 이인기(李麟奇, 1549-1631)를 비롯한 12명의 기로(耆老)가 모였다. 그 몇 해 전인 1623년 인조정변(仁祖政變)의 주역 이귀를 포함하고 있고 또 그림에 찬문(撰文)과 제화시(題畵詩)를 지은 장유(張維, 1587-1638)가 인조정변에 가담했던 사람임을 생각할 때 이 모임은 서인당(西人黨) 원로의 집회였다. 그러니까 이 모임은 그저 국가 원로의 노고를 위로하고 노인의 풍류와 친목을 위한 잔치만이 아니라 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서인당의 결속을 드높이는 당파집회였던 게다. 두 세대가 흐른 1691년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이 발문을 쓴 임모본도 있고 또 누군가가 임모한 또 다른 임모본도 있음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여기 남대문 밖 연못인 남지(南池)에 피어난 연꽃 무리는 너무도 어여뻐서 보기에도 아까울 지경이다. 이들은 왜 저 연꽃 가득한 남지에서 모였을까. 스스로 맑고 깨끗하기 그지없는 당파임을 과시하고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끝없이 이어지는 정권에 대한 도전과 형벌로 피비린내 나는 속에서 비가 갠 날 연꽃 감상은 너무도 한가해 보인다. 이 때 장유는 그 모임을 중국 당나라 백거이(白居易)의 구로회(九老會)에 비하면서 “신선과 같다”고 하였고 또 학을 타고 하늘에 노니는 학상선(鶴上仙) 보다는 장수하면서 한가히 살아가는 불가(佛家)의 지행선(地行仙)이 더 좋다고 하였다. 이렇듯 천상의 복락보다는 지상의 권력을 가까이 두고 살아가는 집권세력의 의욕을 드러냈으니 이 그림은 정치사의 상징물이 아닐 수 없다할 것이다.


그림을 그린 이는 도화서 화원 이홍규(李泓叫)의 아들로써 화원이 된 이기룡(李起龍, 1600-?)인데 1643년에 통신사(通信使)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전후 아홉 차례 국가 기록화 의궤(儀軌) 사업에 참가하였다. 이기룡은 상단에 전각과 중단에 연못, 하단에 남대문과 성곽 그리고 양 옆에 나무 세 그루를 배치하고 사위를 구름으로 감싸 신비로운 별세계처럼 연출했다. 더욱이 버드나무 잎을 열한 개의 덩어리로 하고 멀리 구름 밖에 활엽수 한 덩어리를 두어 모두 12명을 상징하게 했는데 따로 동떨어진 그 한 그루는 열 두 명 가운데 아직 칠십 세가 안된 인물이 참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연못 속을 가득 메운 연꽃 무리의 자태가 아름답다. 타원의 잎새 위에 부채처럼 펼친 꽃잎이 사방연속 무늬를 이루어 어여쁘고 또 어여쁘다. 하단의 남대문 문루와 양옆으로 휘어져 뻗어나가는 성벽도 화폭을 감싸는 날개처럼, 구름처럼 화려하다.


2008년 2월 그 남대문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1907년 조선총독부가 양 옆 날개를 이루던 성벽을 허물었어도, 1950년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건물이었다. 또 저토록 아름답던 남지도 언젠가 사라졌다. 물론 기로회가 열렸던 홍첨추의 집도 온데간데 없다. 남대문을 향해 불길 내뿜은 저 화산(火山) 관악산(冠岳山) 서울대학교를 향해 가던 2011년 3월 어느 날, 불타 버려 흉물스런 남대문 터를 바라보노라니 씌워 놓은 상자 겉에 어설피 그려 놓은 <남지기로회도>가 보인다. 거기 그림 연꽃 보며 눈앞이 흐려지는데, 제 몸 불사른 남대문의 눈물이요 장유가 보았던 새벽녘 이슬이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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