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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경복궁, 그 폐허 속 근정전

최열

금원에 봄이 깊어 꽃은 한참 화사한데       禁院春深花正繁

옛 신하 불러들여 잔치를 베푸셨네          爲招耆舊置金尊

하느님도 때맞추어 비를 보내시니           天工忽放知時雨

온 몸에 함초롬히 젖은 비와 이슬의 은혜   便覺渾身雨露恩


- 정도전, <신궁 잔치에 지음>, 『삼봉집(三峯集)』 2권



1591년 1월, 일본 집정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는 조선 통신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요구하였다. “명나라 정벌을 위해 길을 비키라[정명가도 征明假道]”


짐짓 이를 무시하던 정부는 7월, 명나라가 조선이 일본과 결탁하지 않았나 의심하자 황급히 방위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지만 ‘백성이 부역(負役)으로 원성이 높다’는 이유로 그해 12월, 전쟁 준비를 중단하였다. 8월, 조선 출병을 선포한 히데요시는 1592년 1월 총동원령을 하달하고 15만 대군으로 하여금 4월 13일 부산을 상륙, 5월 3일, 한양을 점령하였다.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은 갖은 만행 끝에 1593년 4월 19일 퇴각하였는데 그 사이 인명 살상이란 최악의 범죄에 버금가는 죄악은 남산 일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의 궁궐과 민가를 파괴한 일이었다. 그런데 1978년에 간행한 『서울육백년사』 제2권을 집필한 연구자는 몇 가지 기록과 일제 강점기 때 『궁궐지(宮闕志)』와 같은 일본인의 기록을 근거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을 불태워 흔적도 없게 만든 장본인을 분노한 조선 백성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1592년 일본군의 한양 입성 때 종군한 일본인 스님 석시탁(釋是琢)이 목격한 바를 기록해 둔 『조선일기』를 보면 일본군대 입성 당시 경복궁은 창건 당시의 위용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북악(北岳) 아래 남쪽 자궁(紫宮)이 있는데 돌을 깎아 사방 벽을 둘렀으며 진정 다섯 발자국마다 하나의 누각(樓閣)이 있고 열 발자국마다 하나의 전각(殿閣)이라 -중략- 이곳이 바로 용계(龍界)인지, 선계(仙界)인지 보통사람으로서는 볼 수 없는 곳이다”


깡그리 파괴했다면 석시탁이 어찌 그 모습을 볼 수 있었겠는가. 이 눈부신 궁궐은 1395년 9월 25일 태조 이성계가 창건한 조선의 정궁이다. 1394년 12월에 착공하여 10개월만에 390칸의 거대 건축을 마치자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시경(詩經)』의 구절 경복(景福)을 따 그 이름을 지어 올리면서 “사방에서 우러러 보는 곳이며, 백성들이 함께 나아가는 곳이라, 그런 까닭에 그 제도를 장하게 하여 존엄을 보이며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하여 보고 느끼게 하여야 하는 바”라고 뜻을 풀어 아뢰었다. 일본 군대가 바로 그 존엄하고 아름다운 궁궐을 시기하여 모두 파괴한 뒤 물러갔으나 정부는 경복궁을 폐허 그대로 버려두었다. 현종(顯宗, 재위 1659-1674)은 이곳을 복원하고자 희망하였으되 끝내 이루지 못하였고 또 1772년 문소전(文昭殿) 터에 비각(碑閣)을 세운 영조(英祖, 재위 1725-1776) 또한 수차례 이곳 경복궁 폐허를 거닐곤 했다.


광화문 근정전 정시도(勤政殿 庭試圖)는 영조가 1747년 경복궁 근정전 터에 천막을 두르고서 과거시험을 치른 일을 그린 역사화이다. 누가 그렸는지 알 수 없는 그림으로 복판의 천막 친 곳에 영조의 어좌(御座)가 위엄을 갖추었다. 하단의 홍살문으로부터 어좌까지 직선으로 길을 냈고 천막 뒷 쪽으로 소나무가 울창한데 그 옆 네모난 연못 가운데 경회루(慶會樓)가 기둥만 남아 있어 황량함을 알려주고 있고 그 뒤켠으로는 외롭지만 백악산이 우뚝하다. 영조는 시험이 끝나자 ‘창업중흥만세법(創業中興萬世法)’이란 시제를 내고서 50명의 신하로 하여금 시를 짓게 하였다. 중흥의 꿈은 꿈이었을 뿐 그로부터 또 세월이 흘러 고종이 즉위하고서 권력을 장악한 대원군 이하응은 1865년 4월부터 경복궁 중건을 시작해 1867년 10월 준공하였다. 1868년 7월 2일 고종이 입주함에 비로소 273년 동안 잃어버린 정궁을 회복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1910년 8월 조선을 강점한 일본은 바로 그 해부터 경복궁 파괴를 시작해 1917년 무렵엔 근정전과 경회루를 비롯한 몇 채만을 남겨두고 또 근정전 바로 앞에 거대한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워 조선 중흥의 희망을 짓밟아 버렸다. 해방과 전쟁 뒤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경복궁은 여전히 제 모습을 모두 갖추지 못한채 중건을 진행하고 있으니 어느 세월에 저 정도전이 태조 앞에서 읊조렸던 경복궁 노래 들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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