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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충단의 눈물, 북일영

최열

지난 날 이곳 일들 모두 아득한 옛적인데      遂令此地成千古 

지금 누가 찾아와 술 한 잔 부어드릴까       更有何人酹一杯 

시를 모두 읊고 숲 속에 앉아 있으니       吟罷麓些良久坐 

단풍나무 푸르고 검은 사이로 저녁놀 기운다   山楓靑黑夕陽廻 


- 임규(林圭, 1867-1948), <장충단시(獎忠壇詩)>, 『북산산고(北山散稿)』



남소영(南小營)은 지금 장충단(獎忠壇) 공원에 있는 어영청(御營廳) 소속 수도방위 오군영의 하나였다. 남소영은 어영청의 분영이었지만 소영이란 이름과 달리 194칸의 대규모 청사를 갖추었으며 영내에 별도로 52칸의 화약고, 북쪽으로 137칸의 남창(南倉)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런 규모를 갖춘데에는 어영의 창설의도가 특별한 탓이었다. 


어영청 본영은 동부 연화방 그러니까 지금 창경궁 건너 서울대병원 남쪽 일대인 종로구 인의동에 있었는데 1623년 인조(仁祖)가 정변을 일으킨 바로 그 해, 새로 떠오르는 후금(後金*청나라)에 맞서 정벌을 준비해야 한다며 설치한 군사기구였다. 하지만 말뿐이었는데 다음 해 이괄(李适)이 반역을 획책하자 개성유수 이귀(李貴)가 화포를 다루는 군병 260명을 모집하여 어영사 깃발을 내걸었고 이 부대가 공주까지 피난가는 인조를 호위했다. 그 뒤 1628년에 처음으로 이서(李曙)를 제조(提調), 구인후(具仁垕) 장군을 대장으로 삼아 하나의 국(局)이 되었다. 하지만 군영이 된 때는 1652년 효종(孝宗)에 이르러서다. 효종은 이완(李浣) 장군을 어영대장으로 임명하고 북벌의 본영으로 삼음으로써 수도방위의 대본영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이렇게 한 시대를 호령하던 어영청 소속 남소영이라고 해도 청나라 정벌의 꿈이 비현실임을 깨우치던 18세기에 이르러 제 모습을 잃기 시작하여 끝내 1894년에 폐지 당함에 따라 옆 남쪽 기슭 백운루(白雲樓)만이 쓸쓸한 풍경을 지키고 있다가 1900년 고종황제가 원수부(元帥府)로 하여금 장충단을 설치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고종황제는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을 기린다는 뜻의 ‘장충단’ 3자를 황태자 순종에게 쓰게 하고 민영환(閔泳煥)으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해 비석을 세우고서 1895년 민비시해사건 때 일본군에 맞서다가 살해당한 훈련대장 홍계훈(洪啓薰)과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을 제향했다. 이처럼 일본의 만행에 저항한 인물을 계속 배향(配享)함으로써 장충단은 국민의 뜨거운 지지를 얻는 장소로 급격히 부상했다. 그러므로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무렵 애창곡 <한양가>에 “남산 밑에 지어진 장충단. 저 집 나라 위해 몸 바친 신령 모시네. 태산 같은 의리에 목숨 보기를 터럭같이 하도다. 장한 그 분네”라는 구절이 자리잡았던 것이다.

  

일본은 1908년부터 제사를 금지하도록 압력을 가하였고 이어 대한제국을 강제합병 한 뒤에는 아예 비석을 들어내 숲 속에 버렸으며 사전(祀典)과 부속 건물을 폐쇄하였다. 뿐만 아니라 1919년 3.1민족해방운동을 당한 일본은 장충단 일대를 공원으로 지정하고 경성부 관할로 넘긴 뒤 벚꽃 수천그루를 심고 광장, 연못, 어린이놀이터, 다리를 시설하였다. 더욱이 상해사변 때 결사대로 죽은 일본군인 동상 <육탄3용사>를 세웠다. 더욱이 일본은 조선 식민지화에 앞장선 이등박문(伊藤博文)을 기리는 박문사(博文寺)도 들여 앉혔다. 1929년부터 1931년 사이, 공원 동쪽 4만평의 숲을 파헤쳐 일본식 절을 지었는데 심지어 경복궁 준원전을 파괴해 옮겨 본전과 서원을 짓고 또 경희궁의 흥화문을 뜯어 와 입구 대문을 세우는 어이없는 짓을 저질렀다. 


김홍도가 <남소영>을 그렸을 때는 청나라 정벌 따위 망상을 하고 있을 때도 아니었고, 일본 침략의 위기가 있던 때도 아니었으므로 군사 시설의 위엄 따위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시원하게 수직으로 날렵하게 선 건물 기둥과 마당 가운데 소나무가 치솟아 이곳이 군영이라는 사실을 암시할 뿐이다. 청나라 정벌에서 항일의 상징으로, 다시 일본 지배의 상징으로 바뀌어 온 이 곳 박문사가 있던 땅에 신라호텔이며, 장충체육관이 들어섰고 일부 땅이 그대로 남아 장충공원으로 유지하고 있는데 임진왜란 때 승병인 사명당 유정(泗溟堂 惟政) 스님과 고종의 신하로 네델란드 헤이그(hague)에서 순국한 이준(李儁) 열사의 동상을 세워 다시 항일의 땅으로 바꿔놓았다. 1919년 3.1 민족해방운동 때 중앙지도부 48명의 한 사람으로 옥고를 치른 뒤 은거하며 저 일본의 추악하고 야만스러운 식민지 지배를 생생하게 목격하다가 해방 직후 기나긴 생애를 마감한 임규(林圭)가 어느 날 장충단에 이르렀다. ‘해마다 한식(寒食) 때 되면 자규(子規*소쩍새)가 와서 울고 간다’는 풍경 보고서 흐느꼈으니 뺨에 흐르는 물줄기가 어찌 장충단의 눈물이 아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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