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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김석신 <담담장락> - 사라진 전설, 담담정

최열

푸른 봉우리 곁에 선 공자의 이름난 정자   公子名亭倚翠巒

생황 울리며 놀던 옛터에 새벽 구름 차워라  笙歌遺跡曉雲寒

풍광을 남겨 시골노인 차지하게 했는데    風光留作村翁占

노니는 사람에게 죄다 주어 맘껏 보게 하네  輸與遊人盡意看


- 이정귀(李廷龜, 1564-1635), <담담정 옛터>, 『월사집(月沙集)』



김정호(金正浩, 1804-1866)가 1861년에 제작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보면 만초천(蔓草川*넝쿨내)이라는 냇물이 뚜렷하다. 넝쿨내는 지금 원효대교(元曉大橋)에서 용산전자상가를 거쳐 용산역 쯤에서 한 줄기는 이태원, 목멱산(木覓山*남산)까지, 또 한 줄기는 청파로(靑坡路), 서울역, 독립문, 모악산(母岳山)까지 거슬러 오른다. 지금은 온통 시멘트로 뒤덮여 냇물이 있었는지조차 모르지만 1967년 복개공사 이전까지는 엄연한 냇가였다. 이곳에 넘쳐드는 물을 막으려 강바닥 파내는 준천(濬川)을 되풀이하던 중 1914년부터 아예 제방(堤防)을, 1967년엔 복개(覆蓋)를 하고 말았다. 이곳 서호(西湖)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일찍이 백제(百濟) 기루왕(己婁王, 재위 77-111) 때 두마리 용이 나타났으므로 용산호(龍山湖)라 불렀는데 이중환(李重煥, 1680-1752)이 『택리지(擇里志)』에 쓴 것처럼 조선개국 직후 서쪽 염창(鹽倉) 모래언덕이 무너져 한강 조수(潮水)가 통하기 시작함에 팔도의 화물을 수송하는 배가 모두 용산에 정박(碇泊)하기 시작했다. 그림에 줄지어 선 선박(船舶)이 이웃 마포(麻浦)와 더불어 조선 최대의 포구(浦口) 유통기지임을 드러내고 넝쿨내 건너 남산 아래 줄지어 선 기와집 또한 상가(商街)며 창고(倉庫)가 즐비하여 번화한 상업지대임을 알려주고 있다.


저 넝쿨내가 한강 서호 또는 용산호에 섞일 즈음 바위가 치솟아 절경을 이루었으니 고려(高麗)의 왕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조선(朝鮮)개국 초였을까, 위태로운 끝자리에 누각 하나 세워 읍청루(揖淸樓)요, 그윽한 안쪽에 정자 하나 세워 담담정(澹澹亭)이라 아름다움 만만치 않았다. 유본예(柳本藝, 1778-1842)가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이르기를,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 1418-1453)이 “담담정을 짓고 만 권의 서적을 쌓아두고 문사(文士)들을 모아 혹 밤새도록 등불을 밝히고 담화를 하며, 혹은 배를 타고 달밤에 놀이를 했다”고 하였다.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안평대군이 살해당하자 신숙주(申叔舟, 1417-1475)가 이곳을 차지하였다. 서용보(徐龍輔, 1757-1824)와 이재학(李在學, 1745-1806) 일행이 어쩌면 압구정(狎鷗亭)을 거쳐 내친 김에 담담정까지 내려왔을지 모르겠다. 김석신(金碩臣, 1758-1816 이후)도 함께 하였을 터 당연히 그 풍경 그렸을 게다. 압구정에도 일곱 사람인데 담담정에도 일곱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서용보 일행이 아니면 또 어떤가. 오히려 절벽 아래 포구 옆 빨래하는 여염(閭閻) 아낙네가 정겹고 그 방망이 소리 울려 퍼져 건너편 동쪽 버드나무 더욱 흐드러진다. 뿐만 아니라 그림 속 넝쿨내는 ‘새벽 빛나는 냇물’이라 욱천(旭川)이란 이름도 갖고 있었거니와 주민들이 밤마다 불 밝히고 게 잡는 풍광이 장관을 이루었다.


화폭 오른쪽부터 아래쪽까지 훤한 모래 들판[白沙場]인데 지금 서울역부터 용산역을 거쳐 한강철교까지 풍경이다. 탁트인 시야가 그 맑고 그윽한 즐거움 베푸는데 더없이 어울렸음에랴, 북벌(北伐)의 꿈을 키우던 효종(孝宗, 1619-1659*재위1649-1659)은 1655년 9월 29일 일만군병(軍兵)을 강 건너 노량진(露梁津)에 집결시켜 삼엄한 열무식(閱武式)으로 군기(軍紀)를 치켜세우기도 하였건만 1876년 개항 이래 이태원부터 용산까지 일본인이 몰려들어 조선침략의 전진기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곳 용산 백사장에서 강 건너 노량진까지 배다리[舟橋]를 놓곤 했었는데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는 빈번한 화성(華城*水原) 길 번거로움 줄이고자 청파동 징검다리에 주교사(舟橋司)란 관청을 설치하였다. 그 징검다리를 청파동 배다리라고 불렀거니와 1926년 무렵 없어진 이 징검다리는 숱한 화제를 낳았다. 광해(光海, 1575-1641 * 재위1608-1623) 시절 징검다리에서 밤마다 상서로운 빛이 솟아났다. 파내보니 현판이 나왔는데 임진왜란 때 잃어버린 숭례문(崇禮門*南大門) 현판이었다. 양녕대군 이제가 쓴 현판 글씨를 되찾았으니 왕위를 아우에게 물려주고 자유인으로 살아갔던 양녕대군을 사랑해마지 않던 숱한 민인(民人)들에겐 너무도 즐거운 이야기라 더욱이 글씨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둔 『추강냉화(秋江冷話)』의 지은이가 생육신(生六臣)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이니 그 이야 끝도 가도 없이 퍼져나가 전설로 바뀌었던 게다. 문장사대가(文章四大家)로 이름 높던 이정귀(李廷龜, 1564-1635)가 사라져버린 담담정 터에서 옛노래 불렀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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