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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김석신 <압구청상> - 탐욕의 풍경

최열

압구정은 산 그윽한 곳에 있어               狎鷗亭在山之幽

아래 있는 맑은 강은 만고토록 흐르는데   下有澄江萬古流

상공께서 한가로운 날 이르러 거닐며       相公暇日來夷猶

산 오르고 물 담그니 마음 절로 한가롭네  登山臨水心悠悠


- 이승소, <압구정시>,『삼탄집(三灘集)』



밀려드는 바닷물과 더불어 날아든 기러기며 오리떼가 쉬어간다는 압구정리(狎鷗亭里)는 1970년까지만 해도 마을과 논둑길 어우러진 벌판이었다. 일백 가구 모인 마을 어귀엔 성황당(城隍堂)도 있고 구렁이 나온다는 구렁박 언덕빼기에 너무도 큰 느티나무 우뚝 솟아 왼쪽으로 동작나루[銅雀津], 오른쪽으로 잠실(蠶室)벌을 거느린채 곱디고운 까치벌이 끝없던 땅이었다. 단오(端午)날이면 지금 한남동(漢南洞)과 옥수동(玉水洞)으로 이름바뀐 한강 북쪽 나루 두모포(豆毛浦)에서 배타고 건너온 시민들이 얼마나 즐거워했던가. 이 이야기는 『한국일보』 1994년 3월 8일자 「내가 살던 압구정리」란 수필에 당시 워싱턴에 살고 있던 김정자라는 이가 베풀어 놓은 추억이다.


도봉산(道峯山)에서 입석포(立石浦), 두모포, 저자도(楮子島)를 거쳐 서용보(徐龍輔, 1757-1824)와 이재학(李在學, 1745-1806) 일행을 태운 두 척의 배가 비로소 압구정리에 닻을 내렸다. 이들을 따르던 화가 김석신(金碩臣, 1758-1816 이후)은 뭍에 오르지 않은채 배 위에서 그 일행을 바라보았다. 치솟은 바위 끝 아슬아슬 자리잡은 건물이 어딘지 불안한데 뒷켠이 솟아 올라 받쳐주니 그제서야 안락을 이루었다. 지붕 안엔 네 명, 밖에 세 명 모두 일곱이 먼저 올랐고 셋이 오르막 길 오르는데 자꾸만 위태롭다. 어인 일인가.


화폭 위 높은 곳에 자리한 건물은 수양대군(首陽大君, 1417-1468 *世祖)의 책사(策士)로 영의정을 세 번이나 지낸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별서(別墅)였다. 수양대군이 1453년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1418-1453)을 죽인 다음 어린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를 때 한명회는 참모로써 갖은 활약을 펼쳤는데 이 어이없는 정변(政變)에 누구나 분노하였거니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이 출현한 때가 바로 이 즈음이다. 시절이 수상할 때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한명회란 사람은 누구인가. 늘 과거에 떨어지던 한명회는 문음(門蔭)으로 겨우 관로(官路)에 나아가 수양대군의 심복이 되어 계유정난(癸酉靖難) 일등공신으로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단종 복위운동을 펼치던 사육신을 주살(誅殺)하여 다시 승승장구, 드디어 판서(判書), 좌의정, 영의정 자리에 올랐고 예종(睿宗), 성종(成宗) 시대를 거치며 끝없는 권세를 누렸다. 과연 세조가 총애하여 천하를 통일한 유방(劉邦)의 모사(謀士)에 비유하여 ‘나의장량(張良)’이라 했으니 정적(政敵)의 시신(屍身)을 밟고서라도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책략가였던 게다.


이 곳은 뱃놀이 즐기기에 너무 아름다운 풍경이라 명(明)나라 사신(使臣) 일행을 모시는 곳이었다. 한명회 또한 명 사신 예겸(倪謙)을 모시고서 이곳에 노닐었고 그 뒤 정자를 세우고서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을적에 정자 이름을 부탁했다. 예겸은 갈매기 나르는 이 곳 풍경을 떠올리며 옛 송(宋)나라 재상 한기(韓琦)의 서재 압구정(狎鷗亭)이란 이름을 따주었다. 감격한 한명회는 자기 호 마저 압구정이라 하고서 자랑하여 마지 않았었다. 지금은 그 정자 흔적조차 사라졌고 1972년엔 강건너 저자도를 몽땅 옮겨 강기슭[江岸]을 메우니 오늘의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자리가 생겨났다.


단종의 편을 들어 세조에 반대하다 죽어간 생육신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이 한명회를 가소로이 여기며 아홉 친구를 모아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하며 두모포를 건너 압구정에 오를 때 한명회를 다음처럼 빗댔다. ‘배추벌레 제 아무리 오래산다 하더라도, 필경에 모두 같이 소멸하고 마는 것’이라고. 사람을 벌레로 비유하여 풍자(諷刺)했으니 통쾌하기 그지 없다. 그러고 보니 김석신이 붙인 제목 청상(淸賞)의 뜻이 ‘탐욕 없음을 기림’인데 그림의 붓질은 거칠고 건물은 불안하며 분위기는 스산한데다 화면은 꽉차서 욕망 덩어리 치솟아 오르는 구도이니 아마도 화가가 이 그림 그릴제 한명회의 탐욕과 죄악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어디 한명회 시대뿐일까. 지금도 풍광 좋은 강변 그토록 정겹던 옛마을 부수고서 홀로 그림같은 집짓고 세금 덜내며 살려는 세상임에랴. 하지만 한명회와 더불어 정치를 함께 하였던 당대 관료문학(官僚文學)의 대표자 이승소(李承召, 1422-1484)는 오히려 한명회를 상공(相公)이라 부르며 찬양하고 있으니 제가 선 자리에 따라 달리 보이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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