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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김수철 전 <경성도>

최열

대개 사대부가 사는 곳은 인심이 고약하지 않은 곳이 없다. 당파(黨派)를 만들어서 일없는 자를 거두어 들이고 권세를 부려서 영세민(零細民)을 침범(侵犯)하기도 한다. 이미 스스로의 행실을 단속하지 못하면서 또 남이 자기를 논의함을 미워하고  지방의 패권(覇權)을 잡기를 좋아한다. 딴 당파와는 같은 마을에 함께 살지 못하며 동리와 골목에는 서로 나무라고 헐뜯어서 뭐가 뭔지 측량할 수조차 없다.


- 이중환, 「인심(人心)」, 『택리지(擇里志)』



이중환(李重煥, 1680-1752)이 『택리지(擇里志)』에 쓰기를,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가 산 줄기 따라 백악산(白岳山) 밑 남경(南京)에 도착해 보니 백악산이야말로 ‘하늘을 꿰뚫는 목성(木星)의 형국(形局)이요, 궁성(宮城)의 주산(主山)’이었으니 ‘동, 남, 북쪽은 모두 큰 강이 둘러있고 서쪽으로 바다의 조수(潮水)와 통한다. 여러 곳 물이 모두 모이는 그 사이에 백악산이 서리어 얽혀서 온 나라 산수의 정기(精氣)가 모인 곳이라 일컫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개경(開京)에서 조선(朝鮮)을 건국한 이성계(李成桂, 1335-1408)가 백악산 아래 남경을 한양(漢陽)이라 이름짓고 천도(遷都)를 단행한 때는 바야흐로 1394년 10월 25일이었다.


새 도읍 한양은 어떤 땅인가. 신숙주(申叔舟, 1417-1475)가 『보한재집(保閑齋集』에 이르기를 ‘한강 언덕에 우리의 문명을 열었다[開我文明漢水陽]’고 하였으니 그로부터 문물(文物)이 강물처럼, 인걸(人傑)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성세(盛世)를 이룩한 땅이다. 하지만 동쪽과 서남쪽이 낮고 비어있어 이백년 뒤 두차례 전쟁으로 외적(外敵) 침탈을 허락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민인(民人)의 빼어난 역량으로 물리친 다음 국가재조(再造)에 성공하여 천도한지 삼백 오십년이 흐른 1751년 이중환은 ‘이곳이 삼백년 동안이나 명성(名聲)과 문화의 중심 지역으로 되어 유풍(儒風)이 크게 떨치고 학자(學者)가 무리지어 나왔으니 엄연한 하나의 소중화(小中華)였다’고 하였다. 또한 그로부터 백년이 흐른 1850년 무렵 화가 김수철(金秀哲, 1820 무렵-1888 이후)이 남산에 올라 도성을 한 번 훑어보았다. ‘큰집들 구름 위로 우뚝이 솟고, 여염(閭閻)은 땅에 가득 서로 연이어, 아침마다 저녁마다 밥 짓는 연기, 대대로 번화하고 태평하리’라고 <신도팔영(新都八詠)>을 읊었던 정도전(鄭道傳, ?-1398)의 노래 그대로였다. 김수철은 화폭을 둘로 나누어 위로 산악, 아래로 도시를 배치하였다. 먼저, 산악은 어떠한가. 왼쪽 끝 잘려나간 바위 월암(月巖)에서 인왕산(仁王山)까지가 흰 호랑이요[右白虎], 오른쪽 낙산(駱山)에서 낮게 깔려 나르는 응봉(鷹峰)까지가 푸른 용인데[左靑龍] 한 복판에서 백호와 청룡을 거느린 백악산이 산천의 주인임을 뽐내며 도성을 호령한다. 저 멀리 삼각산에서 도봉산이 아득한데 구름처럼 솟구치며 하늘로 사라지니 한양의 기운 어디서 흘러왔는지 알겠다.

 

다음, 도시는 어떠한가. 병풍같은 산악 아래 궁궐이 들어섰지만 김수철은 오직 응봉 아래 창덕궁(昌德宮)만 2층 전각으로 그려두었다. 군왕이 머무는 곳이어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화폭 아래쪽 중앙엔 우뚝 솟은 두 그루 소나무를 그렸는데 어쩌면 필동(筆洞)의 노인정(老人亭) 자리 아닌가 싶다. 당대 권문세가인 풍양조문(豊穰趙門)의 조만영(趙萬永, 1776-1846), 조인영(趙寅永, 1782-1850) 형제가 경영하였던 노인정 일대에는 정원용(鄭元容, 1783-1873), 김좌근(金左根, 1797-1869)은 물론 이유원(李裕元, 1814-1888), 김병학(金炳學, 1821-1879)과 같은 인물들이 모여들어 시회를 열고 한껏 풍류를 누렸다. 땅이 깊고 샘물이 넘쳐 흐르는 마을이었으니 이들 재상 말고도 숱한 사람들이 놀러왔을 게다. 


눈길 거슬러 시내 복판을 보면 개천(開川)이 옆으로 길게 흐른다. 이게 요즘 청계천(淸溪川)이다. 유본예(柳本藝, 1778-1842)가 말하길 우리나라 강물은 모두 서쪽으로 흐르는데 오직 개천만이 동쪽으로 흘러 한양 사람들이 바른 길[正道]을 얻었다고 하는데 참인지 거짓인지 알 길이 없다. 지금 서울에는 문물과 인걸이 끝없이 모이고 또 모여 더욱 잘난 이들만 살아남는 경쟁의 도시라 이중환이 말한대로 예로부터 사색(四色)이 모여 살고있어 풍속이 고르지 못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한양을 소중화라 자랑스러워했던 이중환이 쓴 「인심(人心)」의 다음 구절은 오늘날 서울 이야기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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