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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청풍계, 땅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자연인 것을

최열

시험삼아 그 누가 주인인지 물었더니         試問下人作主翁
당대 명문귀족 장씨와 김씨라            勢貴當時張與金
물가의 바위 사랑이 깊어              愛他泉石人膏盲 
부유해도 노을에 마음 두었다네           紈綺有此煙霞心

- 강희맹, <이염의의 백운동(李念義白雲洞)>, 『사숙재집(私叔齋集)』

권신응, <북악십경 청풍계>, 1753, 종이, 41.7 × 25.7 cm, 개인소장.

지금 청운초등학교 뒤편에 있던 청풍계는 『동국여지비고』에서 묘사했듯이 ‘그 골 안이 깊고 그윽하며 냇가와 바위가 아늑하고 아름다워 놀며 즐기기에 좋은 곳’이었다. 지금이야 청풍계곡이 어딘지 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온갖 집들로 뒤덮여 옛 풍경은 사라져버렸지만, 개발하기 이전에는 이토록 뛰어난 명승지였다.

권신응이 1753년에 그린 <북악십경-청풍계(靑楓溪)>를 보면 상단 높은 곳에 ‘인왕산(仁王山)’이라 써 두었고 바로 아래쪽 우뚝 치솟은 바위에 새긴 글자인 ‘백세청풍(百世淸風)’ 그리고 그 아래 기와집에는 ‘산앙루(山仰樓)’와 ‘늠연당(凜然堂)’이라 써 두었으며 화폭 왼쪽 냇가에 초가지붕에는 ‘태고정(太古亭)’이라고써 두었다. 이곳에는 계단식 연못 조심(照心), 함벽(涵碧), 척금(滌襟) 세 곳이 있는데 화폭에서 태고정 옆으로 세 개의 네모로 그려두었다. 조심은 마음을 비추는 연못, 함벽은 푸른 옥돌을 담그는 연못, 척금은 옷깃을 씻어내는 연못이란 뜻인데 조선 후기 최고의 권문세가인 장동김문이 집안 단속을 어찌하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이라 하겠다.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심양(瀋陽)에 머물 때 “청풍계 위 태고정은 우리집 형님이 사시던 곳, 골짜기 숲은 한 폭 수묵화인데[林壑依然水墨圖]암벽은 푸른 병풍 이루었지[岩岩自成蒼玉屛]”라고 읊으며 그리워했다. 바로 이곳 청풍계곡은 정선(鄭敾, 1676-1759)의 그림<청풍계>로 널리 알려진 것처럼 서인당파 출신인 김상헌 가문의 땅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 땅은 동암(東巖) 이발(李潑, 1544-89)의 땅이었다. 이발은 동인당파 출신으로 북인당파 영수로 활약하였던 인물인데 1589년 정여립(鄭汝立, ?-1589) 모반사건을 계기로 서인당이 집권함에 따라 체포당해 장살(杖殺) 당하고 말았다. 그 한 사람의 죽음이야 권력의 무상함 탓으로 돌리면 그뿐이지만 다음 이야기가 놀랍다.

이발의 원통한 죽음이 있은 다음, 서인당은 분이 안풀렸던지 82살의 늙은 어머니와 8살의 어린 아들도 죽였다. 이때 노모는 죽어가면서도 ‘정여립 모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도 형벌이 지나치지 않느냐’고 꾸짖었고 또한 이발의 문하생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죽였지만 단 한 사람도 승복한 이가 없었다고 한다. 이토록 참혹한 일이 있어서였을까. 그 뒤 이 땅의 주인이 된 저 장동김문은 이곳의 바위에다가 서인 노론당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 1607-89)의 글씨 ‘대명일월 백세청풍(大明日月 百世淸風)’이라고 새겼다. 참혹하게 죽어간 이발의 기운을 덮고자 했던 것이겠다.

한 마을에 이웃해 살던 두 가문 가운데 한쪽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고 다른 한쪽은 권문세가로 이후 집권 250년을 했으니 그 터가 명당이라 해도 아무나 지켜주는 게 아닌 모양이다. 그뿐만 아니다. 250년 집권가문도 나라를 빼앗기고 나니 허무하게 스러지고 말았다. 문일평(文一平, 1888-1936)이 지은 『근교산악사화(近郊山岳史話)』에는 이곳 청풍계곡 일대의 소유자를 일제의 군수산업 대재벌 미쓰비시(三菱)라고 기록해 두었다. 미쓰비시는 편리를 위하여 천년 바위를 깨뜨리는 범죄를 저지르며 자연과 인간의 흔적을 지워버렸는데 겨우 남은 한 칸짜리 건물은 노동자들의 숙소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 중에 1935년 이윤영이란 사람이 태고정 뒤쪽에 청운양로원을 짓고 그 일대를 더는 손대지 않음으로써 겨우 풍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 초기인 15세기에는 이곳에 광주부윤이며 해주목사를 역임한 이염의(李念義, 1409-92)가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이 땅의 주인이 이씨가문인가 했지만 강희맹(姜希孟, 424-83)이 지은 <이염의의 백운동>이란 시를 보면 이 씨도 아니고 장 씨와 김 씨라고 한다. 그렇게 땅의 주인은 바뀌고 바뀌는 것을 보면 땅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자연인데도 권력과 금력을 탐욕 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제 것인 줄 아는 모양이다. 하지만 강희맹이 읊은 바와 같이 옛 부자들은 자연풍경을 심하게 해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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