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84)변절의 시대, 정몽주의 단심가를 삼청공원에서 읊다

최열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없고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與之

- 정몽주(鄭夢周, 1337-92), <단심가(丹心歌)>, 『포은집(圃隱集)』

권신응, <북악십경 삼청동>, 1753, 종이, 41.7 × 25.7 cm, 개인소장.

홍석모(洪錫謨)가 1849년에 지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를 보면 한양 여성들은 새해 정월 대보름 이전에 삼청동을 거쳐 숙정문(肅靖門)까지 세 차례 오르내렸다고 한다. 한 해의 불운을 미리 막는 이른바 액막이 치레였다. 재미있는 것은 숙정문과 더불어 창의문(彰義門)인데 경복궁의 왼쪽과 오른쪽 어깨이므로 땅의 기운을 보존하기 위해 조선 개국초부터 문을 닫아두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가뭄이 들면 남대문의 문을 닫고 이곳 숙정문을 열어둔 채 기우제를 지내곤 했다. 숙정문은 음(陰)과 물[水]을 뜻하는 북쪽 방위문이고 남대문은 양(陽)과 불[火]을 뜻하는 남쪽 방위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흥미로운 전설은 바로 숙정문이 어둡고 축축한 음문(陰門)이기 때문에 문을 닫아 두었다는 것이다.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이 1840년에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보면 “이 문을 열어 놓으면 성안 여염집에서 여자의 음행(淫行)이 많이 생겨 서울 장안의 풍기가 문란해지므로 문을 그대로 닫아 두었다”고 했다. 실제로 똑같이 북쪽 문인 창의문의 경우엔 통행에 불편이 있다는 논란이 계속 이어지자 1501년 무렵부터 열어두었지만, 숙정문만큼은 굳건히 닫았던 것이다.

여름이 와 계곡 물줄기가 시원해질 즈음이면 이번엔 한양의 남성들 다시 말해 시인과 묵객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여기 삼청동 계곡을 가리켜 정조대왕(正祖, 1752-1800)께서 국도팔영(國都八詠) 가운데 하나로 지목해 삼청녹음(三淸綠陰)이
라 하였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곳이 남성들의 놀이터였음을 알수 있다. 참으로 이곳 삼청동엔 거대한 바위들이 즐비했다. 계곡의 물줄기가 음기를 품고 있는 삼청동천(三淸洞川)이라면 음기속에 솟아오른 양기의 상징이 바위였다. 우물로는 성제우물(星祭井), 양푼우물이 있고 또 골짜기로는 영수곡(靈水谷), 운장곡(雲藏谷)이 있어 이 모든 것이 음기를 토해내는 물줄기들이요, 또한 삼청동부(三淸洞府)의 입구임을 알리는 병풍바위, 가장 커다란 병풍을 비롯한 말처럼 생긴 말바위, 부엉이처럼 생겼다 해서 부엉바위, 윗부분이 평평하다 해서 민바위와 칠성(七星)에 제사를 지내는 기천석(祈天石), 백련봉 아래 달빛 그림자처럼 아름다운 영월암(影月岩)은 음기 속에서 노닐며 뿜어내는 양기들이다.

권신응이 그린 <북악십경 삼청동>은 그 풍경을 그대로 그려냈다. 한 복판에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있고 기와집 바로 뒤쪽 봉우리 하나가 봉긋이 솟아올랐다. 이 봉우리는 백련봉(白蓮峯)인데 백련봉을 중심으로 커다란 봉우리들이 빙 둘러 원형의 분지를 만들어 놓았다. 여성의 성기를 뜻하는 음부의 깊은 안쪽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이곳에는 삼청도관(三淸道館)이 있었다. 태청(太淸), 상청(上淸), 옥청(玉淸)의 삼청을 모시는 도교의 성전이 있었고 정부에서는 이곳에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초제(醮祭)를 지낼 수 있도록 소격서(昭格署)를 두어 주관하도록 했다.

이토록 신령스럽고 또 아름다운 승경의 땅이었던 삼청동 주인은 19세기 전반기에 이르러 세도정권의 집정자 김조순(金祖淳, 1765-1831)과 그의 아들 김유근(金逌根, 1785-1840)이었다. 특히 <북악십경 삼청동> 그림에 보이는 저 백련봉 아래 기와집은 김유근에 이르러 옥호정(玉壺亭)이란 이름을 갖추고서 당대 명사들이 모여 시를 읊는 문예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러던 것이 식민지시대인 1929년부터 이곳 삼청동 계곡을 공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해 경성부가 임야 5만 평에 순환도로, 산책도로와 정자, 의자 및 목욕장을 시설해 1934년 3월에 개장했다. 해방 뒤에도 공원의 모습을 지속했는데 1973년에 시비(詩碑)가 들어섰다. 정몽주의 <단심가>와 그 어머니 영천 이씨의 <백로가(白鷺歌)>를 새긴 것이다. 2016년 새해부터 변절을 목격하고 있다. 신군부 독재에 협력했던 자를 신군부에 저항했던 정당의 지도자로 모셔와 놓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시절, 문득 삼청공원에 들러 읊조리는 저 백로의 단심가가 어찌 이리도 처량한가.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