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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이하응의 석파정에서 권력의 무상함을 보다

최열

북두성 우러러 태산은 드높은데          魁衡在仰泰山嵬

천리 동쪽 강토가 애달프기 그지 없다       千里東韓不盡哀

요순의 백성 만들 포부 어긋나           堯舜君民違聖世

정자와 주자의 사업은 죽음이 거둬갔네       程朱事業斂泉臺


- 권상하, <죽수서원(竹樹書院)을 찾은 조정만에 화답하여>, 『한수재집(寒水齋集)』


* 죽수서원은 조광조가 사약을 받았던 전남 능주에 있고 조광조를 제향하고 있다.


권신응, <북악십경 삼계동>, 1753, 종이, 41.7 × 25.7 cm, 개인소장.


석파정(石坡亭)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98)의 별장으로 알려져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안동김문 세도가로 영의정을 역임한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의 정자였고 또 일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형조판서를 역임한 조정만(趙正萬, 1656-1739)의 별장이었다. 또 이하응 이후에는 주인이 계속 바뀌었다.이처럼 시대와 권세의 변동에 따라 땅 주인이 바뀌는데도 우리는 왜 석파정이라 부르는 것일까. 아마도 소유자 가운데 최고의 권세가여서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저 석파정이 있는 땅의 이름은 삼계동(三 溪洞)이다. 창의문 넘어 왼쪽으로 인왕산 동쪽의 거대한 바위와 울창한 소나무들로 가득한 계곡 바위에 ‘三溪洞’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삼계라는 이름이 인명인가 싶어 ‘삼계’라는 아호를 쓰는 인물을 찾아보아도 의병장 또는 청백리거나 한양이 아닌 지방 거주인이라 이곳 인왕산 계곡에서 풍류를 누리는 주인일성 싶지 않으니 아마도 자연의 특성을 따라 조선전기 때 누군가가 아로새긴 것이 아닌가 싶다. 삼계동에 암자를 짓고서 별장으로 쓴 최초의 인물은 조정만이었다. 노론당에 속한 조정만은 숙종 때 출사하여 지방관을 역임하였는데 경종 때 신임옥사(辛壬獄事)로 유배를 갔지만 1725년 영조 때 해배되었다. 이후 호조참판, 한성부판윤을 거쳐 공조, 형조판서에 이르렀는데 경학만이 아니라 제자백가에 능통하였고 특히 시문과 서예에 뛰어난 재사였다. 조정만은 이곳 별장에서 문득 머무르곤 했는데 그가 별세하고 15년이 지난 뒤인 1753년 화가 권신응이 이곳 풍경을 그렸다. 그게 바로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북악십경 삼계동>이다.


<북악십경 삼계동> 화폭 하단 왼쪽 모서리에 ‘창의문(彰義門)’이라는 글씨가 있고 또 한복판에 자리 잡은 바위에 ‘三溪洞’이란 글씨가 있다. 하단 기와집에는 ‘소운암(巢雲庵)’이라고 썼고 또 그 옆 큰 바윗덩어리에는 ‘소수운렴암(巢水雲簾庵)’이라고 써놓았다. 소수운렴암이란 ‘물을 품고 구름으로 발을 삼는다’는 뜻인데 이 글씨는 1721년 권상하(權尙夏, 1641-1721)가 조정만에게 써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 주인이 언제 김흥근으로 바뀌었는지 모르지만 1851년에 영의정에 올랐으니까 아마도 이 무렵 전후 아닐까 싶다.


그러나 김흥근의 정자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황현(黃玹, 1855-1910)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따르면 1863년 고종이 즉위하자 고종의 아버지 이하응은 김흥근을 권력에서 밀어내고 재산도 빼앗기 시작했다. 여기에 도성 제일의 별장인 삼계동 정자가 빠질 리 없었다. 이를 가지려고 이하응은 아들 고종으로 하여금 그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오도록 했다. 그날로부터 왕이 머물던 곳이라 하여 김흥근은 아무리 제집이라고는 해도 감히 가지 못했고 이로 말미암아 이하응이 가질 수 있었다. 훔친 셈이다. 그리고 이하응은 이곳에 일곱 채의 건물을 지었다. 안양각(安養閣), 낙안당(樂安堂), 망원정(望遠亭),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風樓) 같은 것인데 그 중 관풍루는 청나라풍으로 지어 변화하는 시대의 건축술을 보여주고 있다.


1950년 6·25전쟁 이후 천주교의 코롬바 고아원, 병원으로 바뀌었고 또 서예가 손재형(孫在馨, 1903-81)이 1958년에 별채를 상명대 건너편 지금 음식점인 석파랑 자리로 옮겨가면서 연못도 없어졌으며 2012년엔 사립 서울미술관이 들어섰다. 지금 깔끔한 조경으로 관객을 맞이하곤 있지만 옛 풍경은 아니다. 이처럼 풍경마저 권세와 재부 따라 변하여 무상함을 깨우쳐 주는데도 그들 모두 권력투쟁에 열을 올리니 안타까운 미물일 뿐, 그렇다. 저 권력의 탐욕자들에 의해 순식간에 이슬로 사라진 사림의 태산북두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운명 무상을 노래한 저 권상하의 탄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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