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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백악산, 왕의 기운 맑기가 삼청같기를

최열

한 구비 시냇물은 말고 얕은데       一曲溪流淺

삼경이라 달 그림자 저물었구나       三更月影殘

손님네 어서 와서 옥피리 불어라       客來吹玉篴

홀로 서서 추위를 이기지 못하니       獨立不勝寒


- 정도전(鄭道傳), <매화를 읊다[詠梅]>, 『삼봉집(三峰集)』


정선, <백악부아암>, 종이, 39.4 × 23 cm, 개인소장.


경복궁 뒤쪽에 우뚝 솟아오른 백악산(白岳山)의 행정 지명으로는 북악산(北岳山)이다. 그래서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의 『서울지명사전』이나 국토지리정보원의 『한국의 산지』에서는 북악산만 있을 뿐 백악산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 이름은 백악(白岳, 白嶽), 북악(北岳, 北嶽), 면악(面岳) 또는 공극산(拱極山)이라고 불렀는데 『동국여지승람』이나 『문헌비고』, 『한경지략』에서 섞어서 썼으면서도 주로는 백악이라 했다. 나는 백악이란 낱말이 좋다. 역사성도 그렇지만 백악이라는 낱말이 풍기는 소리 느낌이 좋아서다.


백악산은 고려시대 이래 왕의 기운[王氣]이 서린 땅으로 알려졌고 실제로 태조 이성계가 이 산 아래 도읍했다. 지금 광화문 앞 세종로라 부르는 육조대로 네거리에서 보면 뾰쪽한 모습이 너무도 신기하다. 그런데 네거리의 고종황제 칭경기념비각 → 이순신장군 동상 → 해치상 → 광화문 → 청와대 → 백악산이 직선으로 올곧지 않다. 이렇게 중심축을 조금 틀어놓은 까닭은 불의 산인 관악산 불덩이가 경복궁에 미치지 않도록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틀어 놓고 보니 광화문이며 청와대 지붕은 물론 세모진 백악산 모습이 훤히 잘 보인다. 그러고 보면 불기운을 방어하는 까닭도 있겠지만, 시야를 가리지 않고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한 게 아닌가 싶다.


천년왕국 도읍 한양의 진산이자 경복궁의 주산인 백악산은 높이 343.4m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여기저기 나무들이 자라서 푸른 빛을 갖추고 있지만 들여다보면 여전히 화강암 덩어리다. 아마도 수수만년 전에는 흰 산이었을 게다. 실제로 산의 서쪽은 흰 바위 속살을 드러낸 채 가파르게 기운 절벽이다. 북악산의 남쪽에는 주로 소나무를 심었다. <동궐도>나 옛 그림들에 소나무 숲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그렇다. 소나무는 참나무와 같은 활엽수와 나란히 심지 않는다. 함께 있으면 이기지 못하므로 소나무만 따로 심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일제가 1930년대에 소나무를 대량으로 베어내 버렸고 그 뒤로 갈참나무, 굴참나무와 같은 참나무 숲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북악산 북서쪽 부암동 54번지 일대는 400년 전 개성에서 가져온 능금 씨앗을 뿌려 능금나무 단지를 만들었던 장소가 있다. 창의문에서 북악산길로 가다 보면 아래쪽이다. 이곳의 토질이 미사토여서 능금이 잘 자라는데 궁궐 수라간에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엔 그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지만, 뒷날 무려 40만 평이나 되는 거대한 능금 과수원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신기한 건 이곳 능금나무는 다른 곳으로 이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왕의 기운이 서린 백악산에서만 가능했던 왕의 능금이었던 셈이다. 북악산 동남쪽에는 갈참나무, 아카시아, 벚나무가 울창한데 1930년대 소나무 숲 제거사건으로 그렇게 바뀌고 말았다. 하지만 충청도 세종시로 내려가기 전까지만 해도 국무총리가 사용하던 삼청동 공관 터에는 오래된 등나무, 측백나무가 자라고 있다. 천연기념물인 이들 나무 가운데 등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나무이고 측백나무는 대체로 키가 작은데 이 나무만은 유난히 그 높이가 11m나 되어 가장 크다. 이 역시 왕의 기운을 한껏 받아 그런 것일 게다.


북악 일대는 한양 명승지가 모여있는 땅이다. 산은 작아도 깊은 땅이어서 서쪽 궁정동엔 대은암, 맷돌바위, 병풍바위가 만리뢰, 박우물을 거느리고 있고 또 동쪽 삼청동엔 기천석, 말바위, 민바위, 부엉바위, 영월암과 같은 바위며, 성제정, 양푼우물, 영수곡과 같은 우물이 즐비하다. 그러므로 『동국여지비고』에서 백악 기슭이야말로 산 맑고[山淸] 물 맑고[水淸] 사람까지 맑아[人淸]세 가지가 맑은 삼청(三淸)이라 했던 게다. 조선시대로 말하자면 왕인 오늘의 대통령 또한 그렇게 맑은 곳에서 맑은 기운으로 맑게 다스리길 간절히 소망한다. 태조와 더불어 천년왕국의 설계자였 던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매화 보며 읊조린 노래처럼 당신 홀로 외롭지 않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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