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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취미대, 하늘아래 으뜸가는 청와대 터

최열

꽃나무 사이에서 나비들 춤추는 것을 보고     花間看蝶舞

버드나무 위에서는 꾀꼬리 노랫소리 들리니    柳上聽鶯聲

살아있는 것들 모두 제 삶을 즐기는데       群生皆自樂

그 중에 제일은 백성을 사랑하는 정이겠지     最是愛民情


- 고종황제, 「상춘(賞春)」, 『열성어제(列聖御製)』


정선, <취미대>, 『장동팔경첩』, 종이, 30 × 22.5 cm, 개인소장.


지금 청와대가 있는 땅은 어떤 땅인가. 고려시대 때인 1099년 숙종이 이곳에 남경(南京)의 궁궐을 건설하라 하여 본전인 연흥전(延興殿)을 지었다고 한다. 그럼 왜 이곳을 선택했을까. 그 터를 살펴본 신하가 “삼각산 면악(面嶽)” 다시 말해 북악산 남쪽에 “산형수세(山形水勢)가 옛글에 부합하므로, 그 줄기의 복판으로부터 시작하여 도읍으로 삼기를 바랍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옛 글은 『도선비기』이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


하늘 아래 으뜸가는 복 받은 땅이라는 뜻의 이 글씨는 실제로 1990년 2월 그 터에서 발굴되었다. 청와대 본관 신축공사 중이던 그 날 거대한 글씨가 새겨진 가로 250cm, 세로 120cm의 커다란 바위를 발견했다. 본관에서 동북쪽으로 계곡을 지나 150m 떨어진 가파른 땅이다. 배수로를 만들다가 발견되었는데 글씨 한 자의 크기가 무려 50cm의 거대한 해서체여서 화제가 되었다. 고려시대 때 글씨가 아닌가 들뜨기도 했지만 며칠 뒤인 20일 현지에 가서 조사를 담당한 금석학자 임창순은 임진왜란 이후에 제작한 것으로 청나라 서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여 신비로움은 반감되었지만, 그 표석에 ‘연릉오거(延陵吳据)’라는 낙관이 있어서 의문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임진왜란을 선조와 더불어 겪은 이호민(李好閔)의 시호가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이므로 어떤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창하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이처럼 천하제일의 땅인 남경궁궐 터가 너무 좁다며 남쪽으로 내려서 경복궁 터를 잡았는데 사실은 고려의 궁궐이 싫어서 였을 게다. 그리고 이성계는 이 남경궁궐을 경복궁의 뒷마당으로 방치했는데 그러다 보니 호랑이가 출몰하기조차 했다. 하지만 세종대왕이 1426년부터 후원으로 꾸며 서현정, 취로정, 관저정, 충순당과 같은 누각들도 세우고 특히 상림원(上林苑)이라는 후원으로 가꾸었다. 이건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직후인 1910년 창경궁에 동물원, 식물원을 만들고서 창경원이라고 격하시킨 일이며, 1915년에는 경복궁의 전각을 모두 헐어내고 공진회라는 박람회장으로 만들어 버린 일과도 같은 짓이었다. 한 나라의 궁궐을 후원이니 박람회 따위로 채워버리는 일 말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일본군대가 경복궁과 더불어 후원마저 모두 불태워버려 황폐한 벌판으로 버려지고 말았다. 겸재 정선이 바로 이곳 상림원 터를 무려 네 폭이나 그렸는데 폐허 이후의 풍경이다. 그중 개인 소장으로 <취미대(翠微臺)>란 제목이 붙은 작품은 지금 청와대 뒤쪽에서 경복궁과 남산 쪽을 바라보고 그린 것이다. 멀리 원경에 뽀얀 남산과 그 아래 회색 띠가 가로지르는 담벼락이 경복궁 북쪽 담장이다. 그 아래 텅 빈터가 바로 오늘날 청와대 땅이요, 조선시대 상림원 땅이며, 고려시대 남경궁궐 터다. 그리고 하단에 둥그런 바위가 곧 취미대다. 미술사학자 최완수는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에서 취미대의 위치를 ‘청와대 동쪽 일대의 북악산 기슭’에 있는 바위라고 지적했는데 아무래도 저 표석의 위치와 엇비슷한 느낌이 든다. 


고종 때 대원군은 경복궁을 재건하여 국가와 왕권을 올바로 세우고자 하였는데 이때 이곳 후원은 문무를 아우르는 과거시험장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서쪽으로는 농번기 때면 왕이 친히 농사를 짓곤 하던 논과 밭이 있었다. 또한, 북쪽과 동쪽에 경호군대인 금위군, 서쪽에 말 키우는 마궐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건물로는 과거시험을 위한 융문당과 융무당, 경무대 그리고 농사를 위한 경농재가 있었다. 하지만 1939년 일제 조선총독은 자신의 거주지인 총독관저를 이곳 경무대 터에 세웠다. 이 관저는 해방 뒤 미군정장관의 관저로 사용하다가 대통령관저로 사용할 적에 경무대란 이름으로 불렀는데 1960년 4·19혁명 직후 청와대란 이름을 지은 이래 1990년 새 건물을 지을 때까지 사용해 왔었으며 끝내 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에 철거해 지금은 영원히 사라졌다. 가끔 청와대 앞길을 지날 적이면 고종황제의 노래가 귓가를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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