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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 탐라궁, 생생조화의 심장

최열

된서리 속에 노란 귤은 초가집에 드리우고    黃橘繁霜垂竹屋 

잔설 속 파랑새는 매화가지 흔들걸세       翠禽殘雪拂花梢 

기나긴 날엔 공무의 여가도 응당 많으리니    簿書永日應多暇 

한라산 마주 앉아 천천히 술잔 기울이겠네    坐對拏山細酌醪 


- 서거정, <제주에 부치다[送濟州]> 중, 『사가시집(四佳詩集)』 14권에서



예전엔 이런저런 사실도 몰랐고 게다가 도성 안에 궁궐이 있었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래서였을까. 탐라 지도에 나타난 도성이나 건물을 보면서도 몰랐었고『신증동국여지승람』에 홍화각(弘化閣)을 궁실(宮室)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서도 별생각이 없었다. 1991년부터 시작한 제주관아 발굴 사업이 성과를 내면서부터 저 궁궐을 뜻하는 ‘궁실’의 의미를 새기며 경이로운 깨우침을 얻었던 것이다. 궁이란 왕이 머무는 곳인데 왜 홍화각을 궁실이라고 했을까. 한갓 목사(牧使)가 집무하는 건물을 궁실이라고 한 까닭은 이곳이 탐라왕국의 정궁이었기 때문이다. 탐라궁이야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여전하다. 


1998년까지 네 차례로 나누어 지속한 이 발굴 조사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8세기 탐라왕국 문화층, 고려와 조선 문화층의 유적과 유물이 쏟아졌다. 제주시는 이 터에 제주목사의 집무처인 영청(營廳)을 복원하기로 했다. 홍화각, 연희각(延曦閣), 영주협당(瀛州協堂), 우련당(友蓮堂)과 연못, 귤림당(橘林堂)과 중대문, 외대문을 복원하고 비석이며 동자석을 모아 2002년 12월까지 완공했다. 지금 '제주목관아'라고 이름 붙인 이 영청은 사라진 역사를 추억하는 탐라의 궁실이었던 것이다. 


탐라왕국의 궁궐이 사라진 때는 1924년부터였다. 영청 최대규모 건물인 연희각을 파괴하고 관덕정 좌우 날개를 꺾으면서 지붕 처마마저 깎아내리더니 1940년에는 홍화각마저 파괴하였다. 아무리 일본 제국이라고 해도 제나라였다면 천년왕국의 수도에서 통치의 심장으로 군림하던 궁궐을 이렇게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을까. 궁궐을 뿌리째 파괴한 일본은 그 터에 살벌한 경찰서와 부속 식당, 구치소, 세무서, 법원 따위를 설치하였다. 해방 뒤에도 그런 용도로 계속 사용했는데 1991년 제주시청은 이곳을 주차장으로 사용하려고 법에 따라 지표 및 발굴 조사를 시작했다.


특별한 것은 탐라도성의 심장인 정궁(正宮) 탐라궁이 남쪽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태조 이성계의 정궁 경복궁이나 창덕궁도 남쪽을 향하고 있으니 이상할 것은 없지만, 흔히 배산임수(背山臨水)를 하는 터에 바다를 뒤로하고 산을 앞에 두는 배해임산(背海臨山)하는 배치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다만 도선(道詵, 827-898)이 『비기(秘記)』 ‘입해지산(入海之山)’조에서 산이 끝나고 바닷속으로 들어가면 세력을 잃어 바다를 상대할 수 없으므로 옆으로 가로지르는 해문(海門)과 청룡백호를 만들라고 하였다. 또 집안 마당 물길로 아침저녁 왕래하면 산과 물의 세력이 서로 대적상등(對敵相等)하여 음양균형(陰陽均衡)으로 생생조화(生生造化)를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탐라왕 을나는 처음엔 남쪽 한라산을 등 뒤 병풍으로 삼고 북쪽 바다를 앞마당으로 삼으려 했을 게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북향이고 또 결코 바다를 이길 수 없고 보니 방향을 바꾸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실제로 산이 끝나고 바다로 들어가는 용연(龍淵) 가까이에 탐라궁을 창건하면서 용연을 등에 두고 해 뜨는 동쪽을 앞마당 삼아 계속 뻗어 나갈 수 있게 하였다. 탐라궁궐을 창건한 탐라 개국시조 을나의 꿈과 저 조선 개국시조 이성계의 꿈이 같았던 것일까. 이성계가 경복궁에 근정전과 온갖 전각(殿閣)이며 누정(樓亭)과 헌당(軒堂)을 지었듯, 을나 또한 갖은 건물을 지었을 것이다. 지금 그 궁궐을 복원했다고 하지만 외롭기 그지없는데 탐라궁이 옛 모습 그대로 장관이었던 시절, 관덕정 「중수기(重修記)」를 썼던 서거정(徐居正, 1420-1489)이 부른 노래 부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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