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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근대의 화가들

이현경

2014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춘계학술대회



우리의 근대는 100여 년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지만, 강제적인 개항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6·25전쟁까지의 불행한 사건을 연속적으로 겪는 과정에서 많은 미술 작품의 손실이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의 근대는 서구의 인상주의 작품들처럼 남겨진 작품을 많이 볼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 시대이다. 그리고 이처럼 근대기 그려진 작품들이 현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만큼 근대미술사의 연구가 순탄치 않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대의 아픔 속에 재능 있는 화가들이 그 예술적 감수성을 활짝 꽃피워보지 못한 것도 무척이나 섭섭한 일이었지만, 부실한 자료로 인해 그때의 발자취를 연구하는데 맥이 끊기는 것도 무척이나 허탈한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난항을 겪고 있는 근대의 파장 속에서 근대 미술에 관한 연구를 집념을 가지고 꾸준히 연구하는 발표자들이 있어 주목된다. 지난 4월 5일(토)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춘계 학술발표회에서는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근대 화가들의 면모를 구체적으로 연구하여 부실했던 근대 미술의 현황을 알차게 메꿔준 시간이었다.


김소연(이화여대) 씨 ‘한국 근대기 미술 유학을 통한 ‘동양화’의 추구-근대 채색화를 중심으로’에서 근대 이후 동양화에서 주로 언급되는 수묵화가 아닌 채색화를 다룸으로써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채색화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동안 동양화의 채색화에 대한 평가는 서양화풍과 주로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들어온 일본의 채색화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되어 왜색 짙은 일본화풍이라는 이름으로 배척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발표자는 이러한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일본인 화숙(畵宿)이나 일본의 미술학교에서 양성된 조선인 화가들의 작업에서 찾아보고, 객관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일본인 선생과 조선인 학생의 영향관계를 정치하게 비교해 보았다. 발표자에 따르면, 근대기 전통적인 화법에서 벗어나고자 새로운 출구를 찾고 있던 동양화에서는 일본화를 그 해법으로 삼게 되었고, 이러한 일본화풍은 조선미전을 통해 관전풍 동양화로 충실히 재현되었다. 특히 일본 유학을 갔다 온 채색화가들은 유학기간에 습득한 일본풍 교육방법으로 다시 국내의 제자들을 길렀기 때문에, 일본적 스타일의 채색기법은 국내 화단에 빠르게 반영되었다. 그래서 오직 일제의 잔재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업으로써 미술 작품을 바라보면, 현재에도 반영되고 있는 미술 내적인 문제를 간과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에 근거한 균형 있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김지영(동경예대) 씨 ‘전화황의 생애와 예술-재일조선인으로서의 의식의 조형화’에서 식민지기에 일본으로 넘어가 전후 일본의 교토 화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화가 전화황(全和凰, 1909-1996)의 생애와 작업을 소개하였다. 재일조선인 1세대인 전화황은 타국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삶의 현실과 고통을 표현주의적인 거친 화법으로 펼쳐 보였으며, 한국전쟁, 고아, 백제관음, 춘향 등의 구체적인 소재를 사용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조선 민족에 대한 애착을 직설적으로 표출하였다. 그는 무시와 차별을 받는 재인조선인의 삶 속에서도 조국을 향한 눈을 떼지 않았으며, 전후 남북한의 현실을 비통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화가로서 증언하였다. 디아스포라(Diaspora) 작가였던 전화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왕성한 예술 활동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국내에서 그에 대한 관심을 발견하긴 어렵다. 그래서 발표자의 이번 연구는 묻혀있던 화가를 발굴한 시도임과 동시에 한국 리얼리즘 회화의 또 다른 계보를 소개한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박수홍(국립전주박물관) 씨 ‘임인(林人) 허림(許林, 1918-1942)의 관전(官展)작품 연구’에서 근대기 보수적인 호남화단에서 기존의 전통 화풍을 고수하지 않고 일본 유학을 계기로 새로운 화풍을 시도했던 허림의 작업 세계를 살펴보았다. 허림은 조선 말기 남종문인화의 대가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8-1893)의 손자로서, 아버지 미산(米山) 허형(許瀅, 1862-1938)과 형 남농(南農) 허건(許楗, 1908-1987)의 영향을 받으며 화가가 되었다. 그는 청년기 일본 내에서 더 자유로운 학풍의 가와바타미술학교를 다닌 후 호남화단에 변화의 바람을 가져왔지만, 25살의 짧은 생을 살다가는 바람에 새로운 시도가 이어지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신수경(명지대) 씨 ‘월북 화가들의 일제강점기 작품 활동-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출품 작가를 중심으로’에서 그동안 근현대미술사에서 월북했다는 이유로 작품이나 개인사적인 자료를 찾기 어려웠던 작가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가장 확실한 편년자료이자 당대의 평가가 많이 남아있는 조선미전의 리스트를 찾아보고자 하였다. 발표자는 조선미전의 출품작을 통해 월북화가의 면모를 좀 더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고, 조선미전을 통한 화가들의 초기 화풍을 검토하면서 이후 월북화가들이 나아간 방향을 가늠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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