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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순철의 아티스트데자뷰(17) 백영수 b. 1922

변순철




새출발
1950년대 중반과 1960년대 중반에 걸쳐 나는 전원과 디즈니를 오가며 출판물의 일을 하였고 여러 곳의 실내 장치를 하였고 대포를 마셨고 간간이 맥주를 마셨다. 어느새 나도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도 화가들은 그림으로만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고 문인들 역시 쥐꼬리만한 고료로 식구들을 부양하기에 모두들 허덕이고 있었다. 하기야 그때는 나라 전체가 보릿고개 넘기는 것이 일년의 커다란 고비였고 박정희 대통령은 “일억불 수출 목표”를 내세우며 새마을운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동안 내 생활은 집 안이나 집 밖이나 모두가 어수선했다. 몇 곳의 단체전에 출품하기는 하였으나 그렇게도 신나게 해대던 개인전은 생활에 쫓기고 일에 쫓기고 하면서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10년의 세월이 후다닥 지나가고 만 셈이다. 


1969년 신문회관에서 오랜만에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계속 그림을 그렸고 전시를 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관계를 하고 있던 출판물의 일들은 나를 쉽게 놓아주질 않아서 많은 시간을 그 일에 빼앗기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 있던 친구가 내게 파리로 가야 한다는 바람을 불어넣었다. 새삼 나이가 들어 타향살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더욱이 이제 겨우 아이 키우는 재미도 좋았고 가정이란 것의 편안함도 알기 시작했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뉴욕의 리바코프 회장에 전시회를 마련해놓고 나를 부추켰다. 1977년 뉴욕에 도착하였고, 당시 코리아 헤럴드 뉴욕 지사의 이모 지사장과 교포 김동윤의 큰 도움을 받았다. 지금도 항상 감사한 마음이다. 그러나 뉴욕은 내 생리에 맞지 않았다. 전시회 준비만 해놓고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파리와 뉴욕을 왕복하며 뉴욕 개인전과 주불 한국대사관 전시실에서 개인전을 하였다. 당시 파리에는 남관, 문신, 한묵, 이성자 등의 한국 화가들이 있었는데, 그중 남관과 문신이 번갈아 가며 호텔로 나를 만나러 왔다. 그러면서 나도 파리 화단에서 한번쯤 활동해 보고픈 의욕이 생기고 조금은 ‘내가 잘 왔구나’하는 마음까지 들고는 하였다.

 


파리 루이스랑즈 개인전을 하였는데, 이것이 내가 구라파에서 가진 단 한 번의 임대 전시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전시회는 파리에 있는 요미우리 화랑과 장기 계약을 맺을 수 있게 된 행운의 전시이기도 하였다. 


아트요미우리화랑은 일본 요미우리신문사에서 경영하는 곳으로, 사마리땡백화점에서 퐁네프 다리를 건너 세느강변이 위치한 곳이었다. 그 화랑은 전시회 뿐 아니라 프랑스와 일본의 문화 교류를 활발하게 추진했는데, 신문사 주최로 ‘영광 300년 루브르미술관전’, ‘르느와르전’, ‘고흐전’ 등등 꽤 큰 전시회를 일본에 유치했다.

 



장기 계약이 성사되자 약간의 자신감과 함께 ‘이곳에서 한번 해봐야겠다’는 의욕이 생겼다. 그러나 막상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면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 마음의 갈피를 못잡고 있을때, 종종 찾아오던 도예가 강석영은 학생 여권을 만들면 여권을 다시 만들 필요가 없고 가족도 데려올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가 알려준 ‘아카데미 그랑쇼미애’에 등록을 하였고 ‘가족을 데려 올 수 있다면 나도 이곳에서 해보고 싶다’는 확신이 들었다. 사실이었다. 쉽지도 그렇다고 어렵지도 않게 아내와 딸을 데리고 나의 진정한 파리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본문은 2000년도 백영수의 회고록『성냥갑 속의 메시지』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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