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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순철의 아티스트데자뷰(15) 최만린 b. 1935

변순철

나의 조각 그리고 드로잉
실크로드를 따라 걷는 상인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나는 그가 어떠한 목적으로 그 길을 걷고 있는지, 그가 짊어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게 되어도 그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할 수 없다. 나는 그가 걸어간 길 뒤에 수없이 남겨진 발자국 속에서 그의 노곤한 삶의 모습과 고뇌와 번민의 흔적들을 발견한다. 때로는 종종걸음으로, 때로는 흐느적거림으로 무엇을 하기 위함의 몸부림이 아닌 그 길을 걸었던 그 자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주목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그의 마음까지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의 명시(名詩)가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단상의 메모들과 습작들이 있어야 가능해지듯이 조형성을 대하는 나의 생각과 그 마음들이 드로잉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나에게 있어 드로잉은 나의 50년사의 살아있는 상념의 흔적이자 또 다른 조각이다. 좋고 값비싼 재료들로 표현되지 못한 작품들도 있다. 가슴 속 깊이 불끈 올라오는 뜨거운 어떠한 것을 무엇으로 그릴까. 어디에 그릴까라는 생각에 앞서, 때로는 화장실의 휴짓조각에, 때로는 철 지난 신문지 위에, 때로는 구멍이 숭숭 뚫린 볼품없는 갱지 위에 값싼 볼펜과 물감들로 그려지기도 했다. 손에 재료들이 잡히면 나는 그 순간 나의 모든 것을 쏟아낼 뿐이다.

 




 

인간에 대한 구상적 표현에서 추상적 조형으로 넘어가는 과정 속에 많은 고민이 있었다. 이미 습득된 나의 것을 버리고 비우는 과정이 필요했다. 시인이 언어라는 방법적인 틀을 버린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처절한 모습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방법과 생각의 모든 틀을 떨쳐 버리고 싶었다. 생명에 대한 그 근원과 본질에 대한 고민들이 나의 모든 것을 비우고 또 비우게 만들었다. 문법이나 정해진 방법이 아닌 자연 그대로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모필’을 선택하였다. 아무 상념 없는 하나의 점들과 그저 한 줄로 그어본 선들이 찍어지고 그어질 때마다 나만의 정신적인 구조를 만들어냈다. 나의 모습 있는 그대로가, 감정의 그 굴곡 그대로가 나의 작품 속에 반영된 것이다. 동그랗고 아름답게 다듬은 정제된 느낌의 작품들뿐 아니라 정제될 때까지의 모든 과정들, 환희와 기쁨의 순간, 그리고 헤매고 번민하는 시간들 모두가 나의 작품세계의 한 부분인 것이다. 나는 예술을 위한 인문학적 관점과 함께 그것에 대한 애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개념적이고 관념적인, 지극히 서구적인 드로잉 개념에서 탈피해 인간적인 관점에서 나의 작품을 바라보기를 기대한다.

 





거창한 타이틀과 이슈가 아닌, 내 마음의 진솔한 고백이자 조각세계인 ‘이브’에서 ‘비너스’까지의 그 내면의 꾸밈없는 발자취를 그대로 보여주고자 한다. 혹자는 잘 그렸다 혹은 그렇지 못하다 하며 내 작품을 바라볼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드로잉은 하나의 포장된 결과물로서가 아닌 나의 내면세계와 삶의 단상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나의 정체성의 또 다른 표현이다.

2009년 4월 어느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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