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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문명과 문화사이

송미숙

송미숙의 미술시평(31)

오래전에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그의 「보편적 문명과 국가·민족문화들」에 관한 논설에서 점증화 되어가며 보편화·세계화 되어가는 문명의 징후들이, 만연해가는 저급문화를 얼마나 발생시키는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저항해야할 필요를 역설한바 있다. 그는 이 강력한 현대문명의 폐해가 낳은 저급문화에 대한 대안으로서 파괴되어가는 한 나라 혹은 한 민족의 전통문화를 되살릴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이 전통문화로 과연 증폭돼가는 현대기술문명의 이기와 충격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인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그는 역설의 논리를 끌어내고 있다. 역설(Paradox)은 어떻게 현대에 살며 근거들로 돌아갈 수 있을까, 즉 어떻게 휴면상태에 있는 혹은 사라져간 과거의 문명들을 재생시키며 동시에 보편적 세계적 문화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것이다. 리쾨르는 질문을 이어가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문명이 다른 문명들과 정복과 지배의 충격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진짜 만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인데 그의 답은 이 직면은 아직 진정한 ‘대화’의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지는 않고 따라서 우리는 단일한 진리를 고수하는 교리적 독단주의가 소멸하며 진정한 대화가 발생하려하는 긴 터널 속에 놓여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에 내린 리쾨르의 진단은 지금 읽으면 그리 새로운 것 같지는 않지만 아울러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이다.<리쾨르 이후 이데올로기가 붕괴되면서 민족적·국가적·개인의 정체성의 이슈, 탈식민주의, 글로컬리즘(Glocalism:세계통합주의+지역중심주의) 등 여러 이론들이 지난 세기 말 동안 쏟아져 나왔으나 담론과 쟁점만 무성하지 방법론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은 제시되지 않고 또 제시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개인의 표명이자 행위인 미술의 경우 이 전통문화와 ‘모던’이라는 이름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현대문명의 사이, 그 틈새를 어떻게 읽고 해석해 나갈 것인가는 각 미술가의 역량과 감각적 재능에 달려있다. 물론 이에 대한 역사인식의 요구가 전제되어야하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역설의 틈새에 대한 인식은 한국이라는 특정한 지역 내에 살며 작업을 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어쩌다 외국에서 외국어를 쓰며 생활을 하게 된 이들이 더 갖게 되며 그 이유는 거리감(Distancing)에서 연유되는 것 같다. 경제적으로 윤택해졌고 그에 따라 국제적인 국가나 기업의 위상도 높아짐에 따라 상당수의 미술가들도 외국과 한국을 오가며 작업과 전시행위가 더욱 빈번해가는 때에 더욱 고민해봐야 하는 숙제가 아닌가 싶다.



중견작가 강애란은 그가 일관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빛의 개념을 최근에 이제 모든 것이 디지털미디어로 전환되는 시점에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미디어인 문자, 구체적으로 책에 적용하고 있다. 강애란의 책들은 그러나 우리가 늘 접하는 실제 책이 아니라 합성수지로 된 아크릴릭 책이며 기계적인 제어절차를 걸쳐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이기도 하다. 가지런히 세로로 혹은 가로로 엇갈리게 책장 혹은 선반위에 정돈된 책들의 커버와 측면의 표면에 스며 나오는 활자와 이미지들은 책의 내용과 주제를 암시함으로서 현실의 책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보면 이러한 이미지와 활자들은 사라지고 격자형 윤곽만 드러내어 마치 추상 색면들을 접하고 있다는 착각도 일게 한다.

관념과 정신의 표상이면서 아울러 지각대상이기도 한 책이라는 문학예술의 근본매체는 작가의 개입에 의해 또 다른 차원, 즉 있으면서도 없어지고, 노출과 은폐, 혹은 회화적 배경과 조각적 사물의 경계사이를 오가는 한낱 지각매체에 불과할 수 있다는 차원으로 관객을 유도하며 그의 지각인식을 혼란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작업에서는 기존 책들의 데이터베이스를 원용해 텍스트를 문자로 해체, 디지털로 프로세스화해 관객과의 인터랙티브한 미디어로 전환케 하고 있다. 이전의 작업에서 배제된 시간성과 호흡을 개입시킴으로서 이 인터랙티브한 프로젝트에서는 오래된, 잊혀져가는 문명의 요소와 현대문명이 낳은 디지털 과학기술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장으로 관객과의 소통을 꾀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꽤 단순한 작업이지만 나름대로의 문명과 문화 사이를 이으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아쉽다면 책들 거의가 서양미술사와 셰익스피어, 존 밀턴, 에드가 앨런 포우같은 외국서적에 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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