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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실파 연구

오광수

<신사실파>는 1947년에 결성되었고 이듬해 1948년에 1회전을 가졌다. 이때 출품자는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3인이었다. 3인 그룹전이란 그룹단위로선 소그룹이다. 통상 2인 이상이 단체전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두 사람인 경우 2인전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으며 굳이 단체전으로 명명하지 않는다. 이런 관례로 따지면 3인의 동인으로 이루어진 전시는 단체전으로선 가장 소규모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우리미술사상에 3인의 동인으로 구성된 단체는 극히 드문 예이지 않나 본다. 출발에선 3인이었으나 해를 거듭하면서 멤버의 수가 늘어난 그룹들이 대부분이다. <신사실파>도 이 경우에 해당된다. 창립전엔 3인이었다가 2회전엔 4인, 3회전엔 6인으로 늘어났다. 작품은 출품하지 않았지만 3회전엔 6인 이외에도 2인이 더 가담되어 있는 걸보면 마지막엔 총 8인의 동인으로 그 수가 불어난 셈이다.

<신사실파>가 첫 전시를 가진 해가 48년, 해방공간에 해당된다. 그리고 53년 마지막 전시가 된 3회전은 피난지 임시 수도 부산에서 열리었다. 그러니까 그룹이 명맥된 것은 6년에 이른 셈이다. 3년간의 전쟁시기에는 전시를 건너뛰었다. 그러고 보면 <신사실파>전은 해방공간에서 동란의 시기를 거치는 급변하는 상황속에서 태어나 명맥된 것이 된다. 어떤 이념의 결속이 이토록 긴핍한 시대상황속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는, 이 시대 미술가들의 의식의 정황을 살필 수 있는 주요한 단서가 되기에 충분하다. 단 3회전으로 끝나긴 했으나 이 그룹이 우리의 현대미술사에서 빈번히 논의되는 점은 조형이념의 전개로서 그룹본위의 명분말고도 각박한 상황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결속력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에 있다.
어떤 그룹이 결속되기까지에는 예술가들의 인화가 먼저 떠오른다. 조형이념의 일치와 그것의 추진의 내연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회원들간의 인화적 결속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룹은 쉽게 와해되기 마련이다. 우리미술사에 나타난 그 많은 1회적인 그룹의 단명도 대부분 인화의 결속에 그 요인이 있었다. 조형이념상에선 다소의 갈등요소가 있더라도 인화적 결속이 강하면 그룹은 의외로 장수를 누리는 예가 적지 않은 편이다. <실사실파>의 6년에 걸친 지속도 조형이념에 못지않은 인화에 그 요인이 있지 않나본다. 소수니까 쉽게 조형적 공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의외로 소수이기 때문에 개별의 갈등이 노출되기 쉬운 반면, 수가 많으면 대세에 이끌려간다는 분위기로 인해 오히려 결속이 강화되는 경우가 많다. <신사실파>가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3회전 (햇수로는 6년)까지 지속될 수 있었다는 것은 조형이념상의 결속보다는 인간적인 관계가 원만했음에서 가능할 수 있었지 않았나 본다. 마지막 전시인 3회전에 사정에 의해 출품은 하지 않았으나 윤효중(조각), 김중업(건축)같은 회화외 인사가 회원으로 영입된 것은 인간관계의 특별한 친숙에 기인된 것이다. 그룹의 명맥이 비교적 오래 지속된 것도 이에 말미암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사실파>전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우리 현대미술사상 최초의 이념적인 서클로 지목된다. 비록 소수이긴 하나 분명한 조형이념을 설정한 단체라는 점에서 이념적 서클로 보기에 무리가 없다. <신사실파>가 등장하게 된 배경, 그룹활동의 내역, 이념설정의 문제점, 우리미술사상에 미친 영향을 살피고 여기 참여했던 미술가들의 개별적 성숙과 이들의 조형이념적 맥락을 살피는 것이 이글의 목적이다. 많은 그룹이 출몰했지만 작가연구에 비해 그룹연구가 의외로 미진하다는 인상이다. 그룹은 조형이념의 형성과 전개라는 측면에서 언제나 미술운동으로 수렴되어진다. 우리 현대미술사가 어떤 측면에서 본다면 그룹에 의한 미술운동에 의해 전개된 역사라는 사실을 떠올릴 때 그룹에 대한 연구는 곧 우리미술사 기술에 핵심적인 사항이 된다고 할 수 있다. 50년대 후반 이후의 현대미술연구에 비하면 50년대 전반, 특히 해방공간(45-48)에서의 미술활동에 대한 연구는 거의 미답의 영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신사실파>연구는 이 미답의 영역에 대한 탐구가 될 것이며, <신사실파>가 우리미술사에 그 올바른 위상의 회복에 일조하는 작업이 되었으면 한다. <신사실파>연구는 먼저 <신사실파>멤버들의 결속의 배경이 되는 상황을 살펴보고, 해방공간이란 시대속에서 <신사실파>의 활동내역을 살피는 것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 같다. 끝으로 <신사실파>가 남긴 영향, 이념적 맥락의 추적, 멤버들의 개별적 성숙의 내면을 살피는 일이 될 것이다.

1. <자유미술가협회>와 <신사실파>

<자유미술가협회>와 <신사실파>와의 관계는 <신사실파>창립멤버 3인이 공교롭게도 1930년대 후반 결성된 일본의 <자유미술가협회>에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먼저 살필 수 있다. 1937년에 창립된 <자유미술가협회>는 동인전으로서의 성격과 아울러 공모전을 통한 이념의 확산을 기하는 단체로, 이 점은 당시 일본의 전위적인 단체의 제도적 공통점이기도 하다. 공모를 통해 두각을 나타낸 신인들을 회우로 영입하고 일정한 기간을 지나면서 회원으로 격상시키고 있다. 창립 당시 김환기가 회우로 영입되었으며, 공모전에서는 두 차례의 수상을 통해 유영국, 문학수, 이중섭 등이 회우로 영입되고 있다.

<자유미술가협회>는 37년 무라이 (村井正誠), 야마구치(山口薰) ,하세가와(長谷川三郞),스다 (津田正周)등이 구성한 <신시대전>이 발전적으로 해체하면서 신진급의 그룹인 <포름전><흑색전>등의 구성원을 회우로써 영입하는 한편, 이 주변에 있었던 일부 신진들을 끌어들였다. 김환기는 그중에 한사람이었다. <자유미술가협회>를 일본에서의 최초의 추상미술단체로 간주하고 있으며 <이과전>의 <구실회>와 나란히 추상미술의 두 개의 축으로 상정하고 있기도 하다.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모전에 나온 작품의 내용은 추상으로만 이룩되어있지 않은 편이다. 모집요강에 따르면 유화, 수채, 소묘, 판화, 꼴라주, 오브제, 포토프라스틱 등 비교적 자유로운 조형의식의 영입에 경주된 인상을 주고 있다. 1회전의 작품 반입수·는 753점, 이중 입선수는 111점이다. <자유전>이 순수한 추상단체가 아니란 점은 부분적으로 야수파계열의 작가들, 초현실계열의 작가들이 영입되고 있음에서다. 초현실주의가 이름으로서의 도입과 전개에 있어 현격한 성격화가 이루어진 점에 비하면 추상미술은 오쿠마에 의하면 “1930년대 전반 일본에서 추상회화에 대한 이해는 놀라우리만큼 피상적이고 불확실했다고”① 지적하는 점에서도 파악할 수 있듯이 성격적으로 애매함을 지녔던 것이 사실이다. 초현실주의의 왕성한 행보에 기인된 점이 무엇보다 큰 원인이었음이 지적되고 있다. “쉬르리얼리즘회화를 중심으로 했던 1930년대의 일본전위미술운동속에서 추상회화의 본격적인 행보는 늦을 수밖에 없었으며 시작은 대략 1935년 전후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고 볼 수 있다.”②

유영국의 37년작 <랩소디>와 <작품B>는 다분히 초현실적 색채가 표상되고 있어 당시 일본의 전위미술의 분위기가 어느면 베어진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오히려 이점을 정영목은 독창적 실험의 편린으로 보고 있다. “그의 초기 추상작품들 중에서 초현실주의적 패러다임의 회화공간내에 구상과 추상의 혼합을 추구한 실험적 태도의 독창성이 더욱 돋보인다.”③ 그러나, 그해(38년) 자유전의 출품에서부터 유영국은 절대적 추상을 지향하고 있어 가장 추상적 작가로서의 위상을 뚜렷이 하고 있다. “즉 그의 초기추상은 대상의 재현적인 이미지를 앱스트랙트화해나가는 과정에서의 결과로 얻은 기하학적 형태의 절대이미지(ideational image)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스타일로 형성된 비 대상의 기하학적 형태들을 화면에 조합하는 방식으로서의 구성적(constructive) 태도에서 출발했다”④

유영국의 추상이 비구상적 경향의 추상이 아니라 추상적 경향의 추상이란 점을 지적한 대목이다. 32년 유럽에서 결성된 <추상·창조그룹(abstraction·création)>에서의 창조부분에 해당되는 추상이다. “자연에서 점차 추출해내는 과정으로서의 추상화 작업과 이미 자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독립된 존재로서의 기하학적 도형으로 이루어진 작업”⑤ 가운데 유영국은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김환기는 전자를 대표해주는 추상작가라 할 수 있다. 대상에서 출발하면서 점진적으로 추상화의 단계를 거친 과정의 경과이기 때문이다. 35년 <이과회>에 출품된 그의 데뷔작 <종달새 노래할 때>만 보아도 자연을 반영하면서 종내는 추상화의 단계로 진입할 기미를 표상해주고 있다. 반면, 유영국의 <랩소디>나 <작품B>에선 자연적인 대상이기 보다는 다분히 초현실적 도형이 선명한 편이다. 그가 쉽게 이미 이루어진 순수추상의 패턴을 자유스럽게 수용할 수 있었던 것도 자연과의 관계가 애초에 설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38년 <자유전>의 김환기의 <론도>, 40년의 <창> 등이 순수한 추상의 도정에 밀착되면서도 아직 자연적 요소를 풍부히 잠재시키고 있는 반면, 유영국의 <릴리프><작품404-D><작품>등 일련의 작품들이 확고하고도 치밀한 추상적 도정을 드러내고 있다. 정영목은 이를 두고 “유영국의 2회전에 출품하여 협회상을 수상한 <작품R3>은 여지없는 아르프의 <릴리프>이다. 형태와 개념이 유사하지만 집중과 확산의 배치가 적합하면서도 단순 명쾌한 형태적 확신감이 아르프 못지 않다.”⑥고 지적하고 있다. “같은 서구 추상미술의 영향이라도 정공법의 도전을 선택한 유영국의 태도와 회유로서의 응용을 택한 김환기의 태도가 방법적으로 달리 드러나는 순간이다.”⑦ 이들이 지닌 이 애초의 방법적 차이가 훗날 <신사실파>시절과 이후 두 사람의 조형적 역정에서 흥미롭게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김환기와 유영국에 비하면 이규상은 비교적 차분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편이다. 그의 자유전 출품이나 이후 <신사실파>참여, <모던아트협회>참여로 이어지는 과정에서도 별다르게 두드러진 양상을 찾아볼 수 없다. 전전에 비해 <모던아트협회>시절의 작품들에 상대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이라면 더욱 요약되고 간결해졌다는 점을 꼽을 수 있는 만큼 자기심화의 역정에 일관된 인상을 주고 있다. 그에 대한 연구가 빈약한 것은 작품상의 별다른 변화의 양상이 발견되지 않는 점외에도 지나친 과작으로 인해 유존되고 있는 작품이 많지 않기 때문에로 본다. 이미 언급한바 있듯이 <자유전>은 비교적 폭넓은 실험과 자유의지의 조형방법을 수용하였다.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의 순수 추상외에도 문학수, 이중섭, 박생광, 안기풍등의 작품이 받아들어진 것도 이에 말미암은 것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당시 조선인 청년작가들의 대거참여다. 하세가와의 2회전 전시평 가운데서도 이점이 지적되고 있다. “협회상을 수상한 문학수씨의 다섯 작품은 본 전람회 중 최미의 주옥이다. 수상회의는 전원일치로 그를 추천했다. 제 1회전에서는 미완성작이면서도 같은 서정의 단면을 보여준 문씨가 단 1년만에 재료의 구사, 표현의 강렬함에서 예상외의 대진보를 보여준 것에 마음으로부터 경의를 표한다. 이중섭씨의 작품도 아름다운 것이다. 히로익하면서도 모뉴멘탈한 구도는 세상의 대전람회의 대작주의에 대한 훌륭한 항의이다. 유영국씨의 릴리프도 그러한 노력을 많이 지니고 있다. 정리와 퇴고가 부족하지만 표현수단에 대한 왕성한 의욕을 높이 산다. 일본화의 박생광 사진의 주현, 그리고 회우로서 예상한 것처럼 큰 자질을 착착 연마해나가고 있는 김환기씨를 포함하여 위대한 문학적, 특히 미술전통을 짊어진 조선반도의 신시대가 이 전람회에서 가장 자유롭게 자극을 준 활동무대여서 신시대의 일본 및 극동 예술을 위해 축복한다. ”⑧

하세가와의 전시평에서와 같이 유독 자유전에 한국의 젊은 세대 작가들이 집중적으로 몰려있는 편이며 또한 이들이 뿜어내는 신선한 감각이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언급은 한국모더니즘 제 1세대의 형성내역의 한 단면을 간파한 것이어서 우리에게 더없이 소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불행히도 주목을 받았던 문학수와 이중섭의 작품이 흑백도판으로 몇 점 가까스로 남아있을 뿐이어서 안타깝기 짝이 없다. 이미 다른 글속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문학수와 이중섭은 각기 말과 소를 소재로 한 작품을 꾸준히 출품하고 있다. 두사람의 작품이 강한 민족적 서사를 조형화한 점에서 공통성을 보이고 있다. 이중섭은 월남이후 꾸준히 소를 모티프로 한 작품을 이어주었으나, 문학수는 북으로 돌아가 이후 그의 작품의 전개양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는 편이다.


2. 해방공간과 신사실파

해방에서부터 민국이 건국하기까지의 45년에서 48년을 통상 해방공간이라고 지칭한다. 다른 모든 부면에도 그렇지만 미술계에도 혼란이 극을 이루었다. 특히 정치적 이념대결인 좌, 우익의 대결양상이 미술계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나날을 격돌로 지세우다시피 했다. 적지 않은 미술단체의 출현과 이합집산의 어지러운 양상도 정치적 이념의 영향에서 기인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 같은 와중에서 출현한 <신사실파>는 정치적 이념과는 전혀 상관없는 순수한 미술가들의 결속이었다. 처음은 순수조형이념을 천명하였다가도 급기야 정치색에 물드는 예와는 달리 <신사실파>는 49년 2회전에 이르기까지 어떤 정치적 여파도 미치지 못했다. 이미 모두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조형이념보다는 인간적인 친화의 결과가 아닌가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사실파>는 그 명칭에서부터 강한 조형의식을 피력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여기 멤버들이, 과거 30년대 후반 일본자유전에 참가한 한국 최초의 추상작가들이 어떻게 해 사실이란 명칭을 그룹 명칭에 가져올 수 있었을까에서다. 사실과 이들의 작품이 어떤 상관관계를 지니는 것일까 의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신사실파>이란 명칭은 누가 제안한 것이며, 그것이 내포한 조형이념의 실체는 무엇인가. 신사실이란 명칭은 김환기에 의해 제안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어쩌면 이들 3인이 최초로 그룹으로 모일 수 있었던 것도 김환기의 제안과 리드의 산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역으로 <신사실파>가 환도이후 얼마 있지 않아 와해되었는데 그 요인이 김환기가 파리행을 결심하고 이에 준비하느라 자연 그룹의 결속이 느슨해졌으며, 56년 파리로 떠나면서 자동적으로 해산에 이르렀다는 주변의 진단이 가장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환도를 하면서 다시 재개된 서울생활의 바쁜 나날도, 그리고 급변하는 주변상황에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임은 짐작할 수 있다. 재도약을 위한 김환기의 파리행을 향한 집념이 자연 지금까지 지속해오던 그룹의 결속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도 생각할 수 있다. 어쩌면, 해방공간에서의 조형이념과 전쟁을 거치고 난 이후의 변화된 상황에서의 조형이념의 괴리도 상정해볼 수 있을 터이다. 어쨋거나 멤버들이나 주변이 한결같이 김환기가 빠지면서 그룹이 와해될 수밖에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만큼 <신사실파>는 김환기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그가 제안했다고 전해지는 <신사실>이란 무엇인가. 안타깝게도 이에 대한 김환기의 언급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다른 멤버들의 언급에서도 신사실파의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애매한 반응을 보이고 있음도 큰 무리는 아니다. “현실속으로 나오려고 부딪히면서도 옛 꿈에 그리운 양 주저함은 무슨 까닭일까? 나는 이 3씨가 저 높은 인간들이 따라 오르지 못하는 산위에 앉아서 별을 따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는 것만 같아 무조건 하고 이 작품들을 몇몇 사람의 기분으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으나, 19세기의 단말마적이고 퇴폐주의적인 불란서의 한때 유산이 우리 현 단계 더욱이나 민족미술건설을 부르짖는 이때 ---세기 세대를 막론하고 추상미술이 존재할 수 없을 것을 부정하여 둔다”⑨는 지적은 이들 작품과 그룹의 존재를 다분히 시대착오적인 현상으로 진단하고 있다. 해방공간에서 민족미술건설이 소리높이 구가되고 있던 즈음에 왠 잠고대 같은 행동이냐는 질타가 내장되어있다. 여기선 신사실에 대한 어떤 이해의 근거도 찾을 수 없다. 김용준이 한해를 회고하는 글 가운데 언급한 <신사실파> 부분이 그나마 이 그룹의 실체를 파악케 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신사실파>는 동인 3인중 이규상, 유영국 양씨는 순수파 미술의 종기(마지막)를 답습하는 정도로 사실주의에서 찾는 객관성이 전연 결여하여 신사실과는 너무나 유리되었으며 김환기씨만이 새로운 시야에서 대상의 미를 감각하려는 노력이 보였다”⑩ 이규상, 유영국이 순수추상을 답습하는 영역에 머물러있는 반면, 김환기는 신사실에 상응되는 새로운 시각과 감각적 대응이 드러나고 있다고 지적한 김용준의 글속에서 그나마 신사실에 대한 나름의 해석이 표명되고 있다. 그 역시 새로운 객관성의 탐구를 신사실로 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여기에 부응되는 것이 김환기의 작품이라고 못박고 있다. 김환기가 제안한 신사실파의 이념적 요체도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본다.

김환기 역시 신사실에서, 사실을 대상의 객관적 파악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새로운 객관성이란데 그 독자적 이념의 구현이 내재되어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대상을 새롭게 파악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대상파악의 관례에선 벗어난다는 것이다. 대상은 대상인데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파악되는 대상은 이미 과거의 방법으로서의 대상이 아니란 것이 된다. 여기에 김환기의 시대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시대는 바야흐로 해방의 새시대가 되었다. 새 시대는 새시대에 맞는 객관적 리얼리티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지금껏 추구해오던 순수추상의 방법으로도, 아카데믹한 객관적 사실의 묘파여서도 안된다는 주장이 깔려 있다. 새 술은 새 푸대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한 신사실은 새로운 리얼리티, 새로운 진실성, 시대적 증인으로서의 현대적 의식을 아루러는 개념으로 파악되어진다. 여기에 시대의 요청으로서의 민족미술건설이 겹쳐진다. 그러니깐 김환기에 의해 제기된 신사실은 투철한 현실인식으로서의 증인의 태도와 동시에 민족미술이란 새로운 방향모색이 어우러지지 않으면 안 된 것이었다. 그의 신사실파전 출품작은 대부분 산실되었으나 그 가운데서도 <꽃가게><산><수림><돌> 같은 남아있는 작품을 통해 당시 김환기의 조형적 내면을 어느 정도나마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구체적인 현실이 모티프로 선택되고 있음에도 아카데믹한 객관적 묘파의 태도는 전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문인화에서 엿볼 수 있는 담백한 구성과 간결한 터치가 돋보이면서 그의 추상체험이 현실적 모티프를 원용했을 때 어떻게 반영되는가를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해방을 전후로 한 한동안 김환기는 조선조 백자와 목가구에 심취되어 수집벽에 빠졌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상봉과 김용준과의 관계도 골동을 통한 의기소통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환기의 소재가 현실적 모티프에서 점차 도자기, 목기와 같은 골동품과 학, 달, 소나무, 매화, 산과 같은 한국고유한 정서의 표상으로 기울어져 간 것도 이에 말미암는다. 해방공간에서의 민족미술 건설이란 시대적 요청을 그는 우리고유한 정서의 조형화를 통해 구현하려고 하였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심화되면서 자신독자의 양식으로 굳어져 간 것이라고 볼수는 없을까.

김환기에 비해 유영국, 이규상은 1,2회전을 통해 일관된 명제를 보이고 있어 추상미술의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유영국이 1회에 <회화>로 일관하고 있듯이, 이규상은 <작품>으로 일관하고 있다. 2회전에서도 유영국은 <직선 있는 구도><회화>로, 이규상은 <컴퍼지션>으로 이어지고 있다. 명제만을 보고서도 이들은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비해 김환기는 <꽃가게><가을><산><달밤>등 구체적인 자연현상을 모티프로 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으며 2회, 3회에서도 <수림><난초><푸른 풍경><항아리와 태양><정물>등 현실적 모티프가 여전하다. 흥미로운 것은 장욱진이 2최전에 가담되어졌으며, 소재적 경향면에서 김환기와 밀착되는 면모를 보이고 있는 점이다. 2최전의 장욱진이 출품한 작품은 <조춘><마을><독><까치><방><원두막>등이며, 3회전엔 <언덕><아이><파랑새와 아이>등으로 현실적 모티프이면서 토속적인 정서가 강하게 반영되고 있는 것들이다. 유영국, 이규상이 순수추상을 지향하고 있는 반면, 김환기, 장욱진이 우리고유한 정서나 토속적인 정감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어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추구한 이념으로서의 신사실의 리얼리티는 무엇이었는가. 유영국, 이규상이 조형자체의 절대성에서 리얼리티를 찾았다면, 김환기, 장욱진은 우리 고유한 정서라는 리얼리티를 추구했다고 할 수는 없을까. 이들의 동거는 대단히 기이하게 보이면서도 각자가 추구한 리얼리티에 일정한 공감을 보냄으로써 결속이 유지될 수 있었지 않았을까 본다. 김용준이 말한 “각개인의 대담한 자유의 세계”가 서로에게 공감을 자아내면서 말이다. 김용준은 이들의 세계를 “현실에서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사실 아닌 신사실을 대담하게 붙들고 놓치지 않는다”⑪고 비판하고 있다. 현실로서의 사실이 아닌 세계, 현실을 빌리면서 현실에서 떠난 세계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려는 의도를 김용준은 가벼운 터치로 이렇게 언급해주고 있다. “장욱진의 그림은 시인, 화가, 문인의 서재에 한점씩 걸었으면 좋겠다. 시를 쓰다말고 그림을 그리다 말고 글을 쓰다말고 잠깐 붓을 멈추고 그 우스꽝스런 아이와 나무의 장독과 까치들을 한번씩 바라보고 웃을 수 있는 기쁨. 이규상의 composition은 다방에 붙였으면 좋겠다. 향기 높은 홍차를 마시다말고 하이얀 종이와 연필을 꺼내어 한번씩 모사해보고 싶은 마음. 유영국의 그림은 호텔이나 백화점 쇼윈도위에 걸었으면 좋겠다. 바라다보면 시원하고 길을 가다가도 멈추고 보고 싶은 생각. 김환기의 그림은 호텔벽에도 좋고 서재에도 좋고 호화판 문화독본을 간행하는 출판사 사무실에도 걸었으면 좋겠다. 현대인의 동양심이 환한 달빛처럼 흐르는 아름다움.”⑫

<신사실파>3회전을 피난시절 국립박물관화랑에서 열리었다. 어수선한 피난살이 속에서 3회전을 마련하였다는 것은 가상한일이나 내용은 그지없이 초라했음이 정규의 다음과 같은 전시평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금년 개최된 신사실파전은 그대로 신사실파의 초라한 분묘밖에는 보여주지 못하였다. 다만 김환기씨의 노력만이 홀로 뛰어나 허물어지는 신사실파를 부축하고 있음이 안타까웠다.” ⑬3회전엔 김환기, 유영국, 장욱진이 참가하고 이규상이 불참한 대신 이중섭, 백영수가 새롭게 영입되고 있다. 정규의 지적처럼 가까스로 전시가 열리었지만 내용은 그지없이 초라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3. 신사실파 이후

백영수에 의하면 “4회전은 6월(56년)로 정하고 그동안 맹렬한 제작을 해오던 중 김환기씨가 갑자기 도불하게 되어 회기가 약간 연기되었다” 고 하는데, 사실상 4회전은 열리지 못하였다. 57년 유영국, 이규상이 새로 출범한 <모던아트협회>창립멤버로 가담함으로써 <신사실파>는 와해되었다고 볼 수 있다. 김환기는 56년에 도불하여 59년에 귀국하고 있다. <모던아트협회>에 참여한 유영국이 조선일보주최 <현대작가초대전>에 깊숙이 관여함으로써 <모던아트협회> 멤버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종내는 탈퇴하고 만다. 이규상만이 <모던아트협회>에 남아 61년 자동해체 될때까지 머물고 있다. 56년 이후 <신사실파>멤버들은 뿔뿔히 흩어져 새로운 그룹에 가담하거나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등 다시 결속할 기미나 명분은 전연 찾을수 없다. 김환기는 약 3년간의 파리체류를 끝내고 59년에 귀국하였다. 그의 작품 경향은 도불전이나 도불시기가 변화없이 일관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그의 일관된 소재는 달, 백자, 산, 새, 사슴, 매화등이었으며 귀국이후 63년에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참가하기 위해 떠날 때까지 소재의 범주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의 작품상에 변화의 흔적이 발견되는 것은 미국에 정착한 65년경부터다. 산이니 새니 백자를 그리던 선이 점점 단순한 선으로서의 추상을 지향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며 긴 띠와 점획이 구성인자로 첨가된다. 그것이 68,69년까지 이어지다가 70년에 접어들면서 순수한 점획의 전면화가 시도된다. 산이나 달이나 구름으로 표상되던 띠는 형상을 지우면서 온전한 선의 구성으로 진행되는가하면 이선을 따라 점획이 장식적 문양으로 첨가된다. 때로 점은 긴띠 모양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산, 달, 구름등의 구체적인 자연의 이미지는 지워지고 화면은 선과 점으로 이루어지는 구성패턴으로 진행된다. 70년에 가서는 점으로 뒤덮힌 전면회화가 출현한다. 이 무렵의 작품이 70년<한국미술대상전>(한국일보주최)에 출품하여 대상을 수상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이다. 64,65년경부터 명멸되기 시작한 점획이 일정한 잠재기를 지나 70년에 접어들면서 마치 만개한 꽃처럼 갑자기 활짝 피어나는 형국을 보이고 있다. 70년에서 작고하던 76년까지 4,5년간 김환기는 점획으로 이루어지는 전면회화를 지속하면서 그의 만년을 장식하고 있다. 사람들이 김환기의 이 만년의 작업을 두고 만약, 김환기가 이 짧은 만년이 없었다면 과연 뛰어난 예술가로 부를 수 있을까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물론, 그의 서울시대나 파리시대의 작품 역시 뛰어난 성과로 치부되지만, 그것은 단지 만년의 점화를 위해 예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견해가 적지 않은 편이다. 그만큼 김환기의 만년의 점화는 김환기를 있게 한 그의 예술의 총화일뿐 아니라 우리현대미술의 찬란한 기념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영국은 <신사실파>이후, <모던아트협회>결성에 참여하였다가 <현대작가초대전>(조선일보주최)의 운영에 깊이 관계하면서 소그룹활동보다 대그룹을 통한 미술운동의 선두에 서는 의식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현대작가초대전>은 그룹전이기보다는 재야작가들을 일당에 모으는 결속체로서 성격을 띄면서 점차 재야권의 중심축이 되어갔다. <현대미술가협회>를 중심으로 한 젊은 재야의식의 연대가 절실하게 요청되던 무렵 출현한 <현대작가초대전>은 자연스럽게 재야의식의 결속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이로서 <국전>중심의 아카데미즘과 대결국면을 이룰 수 있었다. <현대미술가연합><현대미술가회의>같은 재야결집을 독려하는 단체들이 출현했다가는 제대로의 성과없이 사라진 것도 이 무렵이다. 유영국이 재야를 대표하는 작가로서 추앙된것도 이 때였다. <현대작가초대전>이후 유영국은 다시 <신상회>창립에 가담하였다. 이러저러한 재야결속의 논의가 성과없이 끝나고 말자 개성이 강한 작가들의 순수한 모임을 표방한 것이 <신상회>였으며 유영국은 3회전까지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60년대 중반에 들어오면서 유영국은 일체의 그룹활동을 접고 개인전을 통해 자신을 알리는 길을 택하고 있다. 그룹을 통한 조형운동은 젊은 시절에 하는 것이고 중년에 들어온 작가는 모름지기 자기성숙만이 올바른 작가태도임을 자각한 것일까. 작고할때까지 12회의 개인전을 기록하고 있다. 개인전을 통해 자신의 집중적인 제작생활을 알리고 있다. 55년경에서 <모던아트협회>시절인 57.58년경까지의 유영국의 작품에선 이전의 엄격한 기하학적 패턴의 구성에서 벗어나 자연적 이미지를 굴절시키는 변화를 드러내고 있다. 명제는 대부분 <작품>으로 표기되지만, 때로 <산><호수><도시> 같은 대상적 표제가 나타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전 보다 현격히 자연적 이미지가 두드러지고 있다. 이 경우의 자연적 이미지도 김환기의 그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은 물론이다. 김환기가 자연에서 출발하면서 점진적으로 추상의 관념에 도달한 것과는 달리, 유영국은 엄격한 기하학적 구성패턴에 자연적 이미지를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자연적 이미지도 기하학적 구성이란 기본틀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은 말할나위도 없다. 같은 추상작가라도 김환기가 변화의 유연성을 풍부히 내장한 반면, 유영국은 이미 주어진 패턴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엄격성에 묶여있는 것이다. 따라서, 김환기가 전전에서 <신사실파>를 거쳐 파리시대, 뉴욕시대로 이어지면서 변화의 모색으로 점철되는 편에 비해 유영국은 전전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기본적 구조의 면에서 일관성을 유지해보이고 있는 편이다. 이점은 두사람의 개별적 속성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두 개의 유형을 반영해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적어도 패턴의 일관성에 있어 유영국과 밀착되고 있는 이규상은 이미 지적한대로 65년 개인전을 끝으로 이후 얼마있지 않아 작고한 탓으로 유작이 극히 한정되어 있을뿐 아니라 유족의 행방도 알길 없어 작품은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실정이다. 65년 개인전때 동료들에 의해 일부 팔려나간 작품들이 지금까지 알려진 작품의 전체 내역이다. 이규상의 활동은 <신사실파>에서 <모던아트협회>에 머물러 있을 뿐 다른 어떤 그룹이나 초대전에도 참여한 적이 없다. 어쩌면 성격적으로 비타협적인 완고성이 사생활에서 뿐아니라 조형작품으로도 반영되어 나온 것이 <모던아트협회>전체의 인상이 아닌가 본다.

<신사실파> 2회전부터 가담한 장욱진은 그 소재와 소재의 배면을 일관하는 토속적 정서에 있어선 김환기의 서울시대, 파리시대의 그것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김환기가 고담한 문인화적 세계, 아취와 격조의 조형성을 추구한 반면, 장욱진은 토벽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농가의 질박한 삶의 풍정을 다루었으며 희화적 조형성을 구현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대상을 요약해가는 과정에선 추상화의 도정을 예상케도 하지만 장욱진은 종내 자연적 이미지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자연적 이미지는 한국 농가의 원형, 한국농가의 정서의 원형이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후의 <신사실파>에 가담한 이중섭, 백영수는 이후 모더니즘을 잇는 어떤 그룹에도 참여하고 있지 않다. 불행히도 이중섭은 56년에 작고한 반면, 백영수 역시 두드러진 활동을 보여주지 못하다가 80년대 파리로 진출한 이후 활동이 재개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신사실파>는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장욱진이 가담하였던 1,2회전에 그 순수성이 지탱되는 반면, 3회전에선 상황에도 요인이 있지만 새로운 사실, 새로운 조형의 리얼리티를 추구한다는 조형적 이념면에선 많이 퇴색한 인상을 준다. 환도이후 그룹이 지속되지 못했던 근본적 요인도 여기에 있었지 않았나본다.

<신사실파>는 30년대 후반 일본의 <자유미술가협회>에 참여하였던 작가들이 중심이 되어 출발한 조형단체로 해방공간에서 유일한 창작정신에 입각한 순수단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상에선 반드시 일치된 면모를 보이고 있지는 않다. 유영국, 이규상이 여전히 <자유전>의 맥락속에 있는 반면, 김환기는 시대적 의식을 조형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새로운 리얼리티의 구현을 지향하였다. 2회때부터 가담한 장욱진 역시 자신이 추구하던 고향의 이미지를 집약된 조형의 차원으로 승화시켜나갔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개성이 뚜렷한 자기세계를 열린 의식속에 서로 공감함으로써 창작의 의의를 찾으려고 한 것은 아닐까. 그것이 이들의 <신사실파> 이후 성숙해가는 자기완성의 단초를 마련해준 요체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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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오꾸마도시유끼 <1930년대의 일본추상회화-해외동향의 소개와 그 영향에 대한 고찰>, 유영국저널, 2005, 제2집
② 오꾸마도시유끼, 같은 글
③ 정영목 <유영국의 초기추상, 1937-1949>, 유영국저널, 2005, 제2집
④ 정영목, 같은 글
⑤ 오광수 <추상미술의 이해>, p.56~57, 일지사
⑥ 정영목, 같은 글
⑦ 정영목, 같은 글
⑧ 하세가와 사부로 <제2회 자유미술전 입선작품평>, 비노구니, 1938
⑨ 서강헌 <신사실파전>, 자유신문, 1948, 12, 15
⑩ 김용준 <신경향의 정진>, 서울신문, 1948, 12, 4
⑪ 김용준 <신사실파의 미>, 서울신문, 1949, 12 ,4
⑫ 김용준, 같은 글
⑬ 정규 <화단뢰론: 금년도 상반기의 개관> , 문화세계, 1953, 8월호

요약본

<신사실파>는 1948년에 1회전, 49년 2회전, 53년 3회전을 가진 뒤 해체되었다. 창립멤버는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 3인이었으나 이듬해 2회전엔 장욱진이 영입되면서 4인으로 불어났다. 피난지 부산에서 열린 마지막 3회전엔 다시 이중섭, 백영수가 영입되었다. <신사실파>창립멤버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은 1937년에 출범한 일본의 전위단체인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한, 우리나라 최초의 추상미술가들이었다. 해방공간(45~48)에서 출현한 최초의 모더니스트들의 모임인 <신사실파>는, 그러나 조형이념면에선 상충되는 요소를 많이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영국, 이규상이 전전의 추상세계를 그대로 잇는 순수기하학적 추상을 지향한 반면, 김환기는 현실모티프를 대상으로 한 시대의식을 표명하려는 경향을 추구하였다. 유영국, 이규상이 절대한 추상의 세계에서 조형의 리얼리티를 찾으려고 한 반면, 김환기는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현실의 반영에서 리얼리티를 찾으려고 하였다. 2회전에 가담한 장욱진도 토속적인 고향의 이미지에서 새로운 사실의 조형세계를 모색하려고 한 것이다. 이렇게 다른 조형의식을 내보이면서도 이들이 결속될 수 있었던 것은 자유로운 의식을 통해 창조의 방법을 모색하자는 의도에 서로가 공감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소수이긴 하나 이 단체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좌,우 이데오르기의 결렬한 투쟁이 전개되던 시대, 거의 모든 미술단체마저 좌, 우 이데오르기에 휩쓸리고 있던 상황에서 유일하게 순수한 창조정신의 결속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미술사에서 높이 평가되어지고 있다.

피난지 부산에서 마지막이 된 3회전을 끝으로 해체되었으나 이들의 개별적 조형세계의 성숙은 이후 우리현대미술에 주요한 자양으로 기록되고 있다. 조형의 순수성을 추구하는데 있어 유영국, 이규상이 보여준 고집스런 행보와 김환기, 장욱진이 추구한 우리 고유한 정서의 조형화와 그 성과는 우리 현대미술을 더욱 견고하고 풍부하게 가꾸어준 요체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3년 이후 김환기는 서울, 파리, 서울시대를 거쳐 64년부터 74년까지 뉴욕에 체류하면서 격조 높은 추상의 세계에 도달하였으며 보편성을 바탕으로 한 우리현대미술의 고유성을 획득한 기념비적 작품을 남기었다. 유영국은 <모던아트협회><현대작가초대전><신상회>등 그룹운동의 중심에서, 재야세력의 결집을 주도했으며, <신상회>를 끝으로 60년대 중반부터는 개인전을 통해 자기완성의 길로 매진하였다. 장욱진 역시 토속적인 정서의 세계를 밀도 높은 조형성과 해학적 내용으로 일구어내어 우리미술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하였다.

이규상은 순수추상의 세계를 끝까지 지향했으나 불행하게도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했으며, 이중섭은 요절하였으나 왕성한 창작욕으로 주옥같은 작품을 남기었으며 인간적인 면모와 창작세계를 통해 전설적인 작가로 기록되고 있다. 백영수 역시 53년 이후 한동안 정체기를 거쳐 80년대 이후 파리로 진출하면서 창작을 재개하고 있다.


주제어
신사실/ 자유미술가협회/ 해방공간/ 리얼리티/ 절대적추상/ 비구상적 경향/ 한국적 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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