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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박현기를 다시 생각한다

오광수

-그의 10주기 회고전을 보고서

박현기와 나와의 관계는 그의 첫 비디오 아트의 등장시기로부터(1979) 작고하기까지(2000)로 이어진다. 79년 상파울로 비엔날레 한국 커미셔너로 지명된 나는 7명의 작가를 선정했는데 박현기는 그중의 한명이었다. (당시 선정된 작가는 김기린, 진옥선, 최병소, 이상남, 김용민, 이건용, 박현기) 단색파를 중심으로 개념예술의 확대속에 연계된 작가를 포함하였다. 커미셔너를 위시해서 3인의 작가가(김용민, 이건용, 박현기) 현장제작을 위해 상파울로로 날아갔다. 우리들은 1주일가량 상파울로에 머물면서 현장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이 꼬이기 시작했다. 비디오의 시스템이 우리와 달라 우선 이를 빌리는데 동분서주해야 했으며 그 흔한 돌도 상파울로 외곽 수십킬로미터에서 가까스로 구해올 수 있었다. 박현기의<비디오돌탑>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현지 한국교포(당시 한국교포는많지 않았다)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많은 어려운 일들이 처리되었다. 그들과 같이 나눈 브라질 고유의 음식은- 페주아다, 스라스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당시 상파울로 비엔날레는 베니스 비엔날레와 맞먹을 정도로 규모나 내용이 알찬 편이었다. 무엇보다 국제적으로 전환적 분위기가 농후한 상황을 실지로 목격한 것이 대단한 체험이지 않을 수 없었다. 미니멀리즘, 개념예술에 대한 새로운 기류로서 드로잉의 재발견이 크게 대두되고 있었다. 1인의 드로잉작품만으로 전관을 채운 국가도 있었고 그룹단위의 드로잉으로 역시 관 전체를 메운 국가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미니멀리즘, 개념예술에 대한 미학적 정비가 만만치 않은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비디오아트는 새로운 미디어로서 각광을 받기 시작할 때였다. 박현기의<비디오돌탑>과 이건용의 신체드로잉의 퍼포먼스, 김용민의 현장제작으로서의 드로잉이 기묘하게도 시대적 조류와 크게 어긋나지 않으면서 한국현대미술의 독특한 양상으로서 단색화가 당당한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특히 박현기의<비디오돌탑>과 개막전에서 가진 이건용의 퍼포먼스는 많은 참가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것이었다. 박현기의비디오아트는 영상위주의 다른 비디오아트와 대조를 보이면서 새로운 매체로서의 비디오 아트로서보다는 보편적, 수평적차원에서의 개념예술과 밀착된것으로 한국의 전체작품에 공감되는 명상적 분위기를 구현해주었다. 서구나 남미의 비디오아트가 보여주는 총체적 감각의 현란한 영상, 물량주의적 제시와는 대조를 보임으로써 그 독자의 영역을 피력해준 것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다음해 파리 청년작가 비엔날레에 초대되기도 하였다.

박현기는 홍익대에서 회화와 건축을 전공했으며 향리인 대구에 내려가 건축관계 사무실을 열고생활의 방편은 주로건축 실내디자인에 기댄 반면, 현대미술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이강소, 최병소등과 같이 대구를 중심으로 한 현대미술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하였다. 74년‘대구현대미술제’는 70년대 후반을 풍미한 전국단위의 현대미술운동의 효시로서역할을 다했으며, 대구가 현대미술의 주요한 거점으로 자리잡는데 박현기를 비롯한 몇몇작가들의 기여는 새삼스럽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2000년 광주비엔날레전시 총감독으로 내가 임명 되었을때도 그는기획위원의 한사람으로 적극적인 참여를 보여주었다. 전시장구성에서부터 진열에 이르기까지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작업이 되었다. 대구에서 광주로 오가는 회의에도 빠지지 않고 참가하면서 집에서 싸주는 도시락을 언제나지 참하였다. 이미 병이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진입한 후였다. 가장 왕성하게 일할 나이에 타계하였다는 것이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흔히 박현기를 이야기할 때 토착적, 자생적 비디오 아티스트란 명칭을 부여한다. 그의 비디오아트는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거나 일정한 수업을 받은경력도 없다.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해결하였다. 비디오 아트가 지니는 테크놀로지의 현란한 매체적성향이나 물량적영상위주와는 애초부터 거리가 있는것도 이 같은 시대적 경향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비디오매체가 지닌 테크놀로지의 수단에 함몰 되지 않고 오히려 명상적, 개념적 채널로서의 자기언어를 만들어 간것이다.

박현기는 회화와 건축을 전공했으며 건축, 실내디자인에 종사한 연고로 그의 작업에 도건축적장치나 해석이 다분히 반영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번 10주기 회고전에 나온 태반의 작품도 그가 건축가 출신의 비디오 아티스트란 내력을 흥미롭게 반영해주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돌과모니터의 만남이 이루어내는 자연과 테크놀로지, 명상과 변화의 대립과 조화는 그의 작품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유추케 하며 그가 현재적 상황에서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를 극명히 시사한다. 처음부터 자기의 언어를 갖고 다듬어 종내는 독특한 자기양식을 완성한 그의 예술은 모방과 아류가 판치는 오늘의 상황에서 다시금 음미해 볼만한 가치가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우리가 박현기 10주기(3.9-3.28 갤러리현대)를 맞으면서 그를 다시금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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