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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석남 이경성선생의 삶

오광수

우리 현대미술의 사표(師表)이신 석남(石南) 이경성(李慶成)선생이 지난 11월 26일 소천(召天)하시었다. 삼가 명목을 빌면서 선생의 행적을 되돌아본다. 선생은 해방 후 인천시립박물관 관장을 시작으로 미술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이화여대, 홍익대에서 미술사, 미술이론 교수로 재직하는 한편 미술평론가로서의 왕성한 활동을 펼쳐 보이셨다. 창작을 경업하지 않은 최초의 직업비평가로서의 활동은 우리 근대기의 미술 전개와 작가연구로 이어지면서 근대미술사가로서의 현저한 업적도 남기시었다. 선생은 또한 최초의 전문가 관장으로서 현대미술관의 기틀을 다지는데 결정적인 역할도 다하였으며, 미술행정가로서의 경험은 워커힐 미술관장, 올림픽미술관장, 일본소케츠명예관장으로 이어졌다. 선생의 생의 역정을 되돌아보건대 전반이 미술평론가, 미술대학교수시절이었다면 후반은 미술관장시절이었다고 할 수 있을듯하다. 개별적인 작업에서 점차 전체적인 작업으로 진행되어 왔다고 하겠다.




미술계의 거목으로 업적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선생의 관형사는 미술평론가였다. 창작경업의 미술평론가들만 있었던 50년대 유일한 직업평론가로서 활동했을 뿐 아니라 미술평론가의 위상을 더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어느 분야이든 선각자는 고되고 외로운 편이다. 선생은 주변의 몇몇 분과 후진들을 규합하여 미술평론가들의 권익을 추구하고 미술평론가의 역할을 천명하는데 앞장섰으며 오늘날 활동하는 미술평론가들의 길을 열어주셨다. 선생의 미술평론가로서의 업적은 앞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논구되고 평가되겠지만 시적인 감각과 쉬운 문체의 비평적 언술은 많은 사람들에게 부담없이 읽혔으며 난해한 현대미술을 일반에 소통시키는데 일정한 역할을 다하였다. 미답의 영역이었던 근대미술사의 정립은 무엇보다도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근대미술이 미술사영역으로 인정받는데 있어 선생의 노력이 없었다면 학문으로서의 제자리를 찾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시작된 후반기의 역정은 미술평론가, 미술사가로서의 역량을 공적인 무대에서 펼쳐 보인 것이라 할 수 있을듯하다. 관료들에 의해 이름뿐으로 유지되었던 현대미술관을 제대로 된 미술관으로서의 제도와 규모를 만드는데 헌신했으며 현대미술관의 기능을 신장하는데 열정을 쏟았다. 현대미술관이 우리 현대미술속에 차지하는 선도적 위상을 정립하는데 있어 실로 선생의 공적은 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잊지 못할 것은 <석남미술관>제정이다. 35세미만의 젊은 작가들을 대상으로 한 석남미술상은 20수회를 거치면서 많은 뛰어난 신진작가들을 배출하였다. 이 상을 받은 젊은 작가들이 이제는 중견으로 성장하여 우리미술계의 주요 인자로 역할을 다하고 있음을 목격할때마다 이 상의 중요성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미술관장 시절부터 시작한 습작은 만년에 이르면서 무르익어가는 창작의 결실로 이어졌다. 인간을 모티프로 한 간략한 선조의 작품은 어느 시점에 이르러 단순한 아마츄어의 경지를 넘어 독특한 세계로 전개되었다. 선생의 만년은 어쩌면 창작의 희열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하다. 비평에서 시작하여 창작으로 종결된 선생의 미술의 길은 어느 면 참으로 행복했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생이 우리에게 남긴 아름다운 기억은 따뜻한 인간애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술을 사랑하고 종내는 인간을 사랑한 선생의 삶의 역정은 오래도록 우리들의 기억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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