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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제 53회 베니스 비엔날레 _화두의 부족, 그리고 현상

오광수

오광수 미술칼럼(43)

베니스 비엔날레는 횟수로 치면 백년을 넘겼다. 연령에서 오는 노후화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쇠잔한 모습이 역력하다. 아스날의 본 전시와 각 국가관 전시의 두 개의 체제가 그나마 변화를 이끈다고 할까. 노후화를 벗어나려는 시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선 젊은 예술가들의 수혈이다. 베니스는 그 연령에 맞게 관록과 권위로 포장되어 있어 이미 완성된 예술, 이미 널리 알려진 예술가들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명분을 지탱시켜 왔다. 그러나 오늘의 예술은 언제나 미완으로 해서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으며 눈길을 끌 수 있다. 베니스가 이왕의 기득권을 유지해가면서 젊은 피를 수혈해가는 전략을 펼쳐 보이는 다소 타협적인 방향을 지향해보이고 있는 것도 완성과 미완, 검증된 것과 검증되지 않은 것을 섞어놓음으로써 오히려 긴장감을 얻을 수 있지 않았나 한다. 이 점 상당히 성공을 거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완성과 권위만 있는 것도 좋지 않지만 미완과 생경함만 있는 것도 불안하기 마련이다. 대개의 신생 국제전이 후자에 치우쳐 있는 반면 베니스는 그 나름의 균형감각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한국관의 한계
베니스의 구조적 장점은 자유로운 국가관과 주제에 따른 아스날전이 공존하고 있음이다. 각국관은 어차피 공존과 대결이란 경쟁의 상황 속에 놓이게 된다. 한국이 독립된 자국관을 가진 1995년 이래 이 상황은 지속되고 있는 편이다. 여러 가지 불리한 조건 -전시장으로서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지나치게 구석 자리에 내몰려 있는- 에도 불구하고 한국관은 꾸준한 관심을 끈 것이 사실이다. 우리미술의 역량이 여러모로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관이란 좁은 통로를 통해 한국의 오늘의 미술을 제대로 알리기엔 너무 역부족이란 인상이다. 과거에 비해 지원과 후원이 좋아진 상황임에도 한국관 하나로는 제대로 우리를 알리기엔 많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전략적인 측면을 고려한다면 비엔날레가 열리는 시기를 전후해 한국미술을 제대로 알리는 별도의 특별전 같은 것을 구성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본다. 그 것도 한국의 해라고 할 만큼 대대적인 기획이 실현된다면 더욱 이상적일 것이다.
물질로 작품을 찾기보다는 현상만이 존재한다
비엔날레는 한 시기의 미술의 양상을 펼쳐 보이는 곳이다. 한 시기의 화두와 관심이 이곳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비엔날레를 비롯한 각종 국제전이란 현대미술의 한 단면을 보여준 다고 할 수 있다.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6.17-11.22)에선 두드러진 화두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소 맥빠진 인상마저 준다. 그러나 한동안 지속되었던 매체예술 -미디어아트, 사진 등- 이 급속하게 쇠락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과격한 정치문제, 사회문제의 범람도 찾을 수 없
다. 맥빠진다는 인상은 아마 이런 현상에도 원인되는 것 같다. 대신 그렇게 두드러지진 않지만 생태, 자연, 환경 같은 문제가 전반적으로 많은 관심 속에 떠올라 오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은 보다 근원적인 인간문제이기도 함은 결코 지나칠 수 없다. 인간을 에워싼 자연과 환경, 그것의 변화에 따른 생태계의 파괴와 재앙이 밀물처럼 서서히 밀려오고 있음을 예감시킨다고 할까. 새삼스럽게 글로벌시대라는, 또는 지구촌시대라는 구호가 실감을 더해간다. 인간은 혼자만이 살수 없고 서로 연대되지 않으면 안되며, 자연, 환경과 더불어 공존하지 않으면 안되며, 글로벌, 지구촌으로써 인류전체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에 와있다는 사실을 실감시킨다.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하찮은 풀 한포기, 가는 들꽃 한 송이에도 관심을 쏟는 것은 그것이 바로 인간의 몸과 정신일 수 있다는 사실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작품들은 심각한 의식의 산물이 아닌 극히 상식적인 선택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평범속에 놀라운 기적을 내장하고 있는 일상의 광휘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임을 가만히 속삭여준다고 할까. 그래서 부담감이 없으면서도 무언가를 생각게 하는 여운을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시장에 온 사람들이 지나치게 어떤 구체적인 작품을 찾으려는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작품의 전면과 후면을 가로지르는 현상이 무엇인지를 보지 않고 구체적인 물질로써의 작품을 찾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문제의 작품일수록 구체적인 물질로써 드러나는 결과물이 아니라 어떤 현상일 뿐이란 점을 부단히 간과한다. 작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미술현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국가관상을 수상한 미국의 부르스 나우만은 물질로써의 작품과 미술현상 중간쯤에 위치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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