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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감수성의 비평가 이일

오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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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의 비평가로서의 궤적은 1961년으로부터 시작된다. 59년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리는 파리 청년작가 비엔날레의 파리 현지 커미셔너이자 특파원으로서 참여한 것이 미술평론가로서의 첫 발이었다고 할 수 있다. 때마침, 파리에 도착한 박서보의 종용과 의기투합이 비평가로서의 자신을 가다듬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65년 귀국과 더불어 홍익대에 이론 강좌의 교수로 채용되는데도 박서보의 역할이 지대했다. 그는 작고하기 직전, 정년퇴임에 이르기까지 30년을 홍익대에 몸담아 있었다. 그의 비평가로서의 출발은 파리생활을 통한 현대미술에의 체험이 주요한 자산이었고 홍익대란 직장에서의 많은 작가들 동료들에 에워싸인 학교생활이 비평가로서 순탄한 길을 걷게 하였다.

원래 그는 문학 지망생이었고 파리로 가기 전에 이미 한사람의 시인으로 등단한 바 있다. 그와 같은 문학적 소양이 미술평론가로서 발돋움하는데 다시없는 자양이 되었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비평가 가운데 가장 미문을 쓰는 것으로 알려진 그의 문장 스타일은 일찍이 시를 썼기 때문에 얻어진 소양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등장하던 60년대 비평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잠시 우리 근,현대 비평의 내역을 소급해보자. 우리의 근,현대 비평은 20년대까지 소급되어진다. 김찬영, 김복진, 안석주, 윤희순, 김용준 등에 의해 비평 활동이 명맥 되었는데 이 상황은 해방 이후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창작 겸임의 비평가들이었다. 순수한 직업 비평가의 등장은 50년대 초 이경성으로 부터이다. 비교적 비평 활동이 왕성한 면모를 드러내었던 50년대는 해방 전과 같은 겸임 비평가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김영주, 김병기, 정규, 이봉상, 박고석 등이 대표적인 겸임 비평가들이었다. 순수 비평가로선 한 동안 이경성이 유일했으며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에 걸쳐 방근택, 천승복, 이구열, 석도륜 등이 가담되었다. 57년엔 김영주, 이항성 등이 중심이 된 한국미술평론가협회가 출범하지만 구체적인 활동상황은 점검되지 않는다. 그러던 것이 63년에 가서 다시 한국미술평론인회란 것이 급조되는데 이는 63년 국제전의 참가를 앞두고 미술관과 평론가협회가 있어야 한다는 참여 조건에 맞추기 위한 방편이었다. 국립박물관이 있었으니까 미술관 조건은 어느 정도 갖춘 셈이었으나 평론가협회가 없었기 때문에 부랴부랴 서둘러 만든 것이다. 평론가협회가 두 개로 난립해서 이를 통합한 것이라기도 하지만 기존의 협회가 유명무실했음은 사실이다. 65년에 오자 파리서 귀국한 유준상, 임영방, 이일 등이 가세하면서 새롭게 한국미술평론가협회를 탄생시켰다. 창작 겸임의 비평가는 제외되고 순수한 비평가들인 이른바 직업 평론가들의 최초의 결집이었다. 파리서 돌아온 세 사람의 비평가의 참여로 인해 갑자기 평단은 풍성하고 활기가 돌았다. 그 가운데서도 왕성한 평필을 구사한 이는 이일이었다.

65년경은 우리 현대미술이 국제무대로 발돋움하던 시점이기도 하다. 비평가의 활동이 그 어느 시기보다도 절실하게 요청되던 시기였다. 이 같은 요청에 이일은 재빨리 부응하였고 비평가의 역할을 누구보다도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 현대미술은 아직도 앵포르멜의 여진이 남아있었던 시점이어서 추상미술에 대한 열망이 높아있었다. 그가 번역한 미셀 라공의 <추상미술의 모험>은 젊은 세대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획득하고 있었다. 해외의 정보망이 미급했고 제대로 된 현대미술에 대한 서적이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 강단에 있으면서도 현장 비평에 적극적이었다. 홍익대란 울타리가 자연 그로 하여금 현장에 대한 관심을 끌게 만든 것이다. 작가들과의 동지적인 유대는 69년 AG 창립에 그대로 이어졌다. 67년에 있었던 청년작가연립전의 열기가 자연스럽게 AG 창립을 독려한 것이 되었다. 바야흐로 70년대를 향한 실험의 봇물이 준비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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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 그룹은 작가들만으로 이루어진 단체가 아니라 비평가들도 참여하였다. 작가와 비평가가 동시에 참여한다는 것은 미술 운동으로서의 그룹의 역할을 인식하였고 운동의 효과적인 전개에 있어 비평가의 상호 공동 작업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의 그룹들이 이념의 표방에 비해 그것을 추진해가는 이론적 바탕이 부실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이를 지양하기 위해선 작가와 비평가의 공동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아마도 창작과 비평이 공동의 작업을 펼친 것은 AG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AG는 해마다 주제에 의한 기획전을 마련하였다. 통념의 그룹의 연례전이 아니라 멤버 전체가 하나의 주제로 상호 교류하고 토의한다는 형식을 취한 것이었다. 이론 빈곤의 우리 미술의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란 잡지를 발간한 것도 미술 운동의 전개에 있어 필수적이란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립 초기에는 이일과 필자가 비평가로 참여하였으나 구성원의 확장에 따라 비평가로서 김인환이 새로 가담하였다. 이들은 한 시대의 미술을 이끌어간다는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H. 리드가 말한, 한 시대의 미술은 몇 몇 천재들에 의해 이끌어져 간다는 신념을 스스로 체득하고 있었다고나 할까. 이들이 지닌 엘리트 의식은 외부로부터의 선망과 동시에 질시를 받은 것이 되었다.

AG의 주제전은 당시로선 가장 왕성한 실험의 마당이었다. 70년대 전반이 전에 없는 실험의 열기로 들떠 있었던 전면에 AG가 있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이 벌인 주제 전으로 <환원과 확산>, <현실과 실현>은 다 같이 이일의 발상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나 그는 환원과 확산이란 명칭에 오랫동안 애착을 지니었다. 그에게 있어 환원과 확산이란 무엇이었든가. 잠시 그의 말을 인용해보겠다.
“......<무명의 표기>로서, 예술은 그대로 알몸의 예술이다. 예술은 가장 근원적인 자신으로 환원하며 동시에 예술이 예술이기 이전의 생의 상태로 확장해갔다. 이 확장과 환원의 사이 - 그 사이에 있는 것은 전일적이며 진정한 의미의 실존의 역학이다. 왜냐하면 참다운 창조는 곧 이 실존의 각성에 있기 때문이다. ........... 만일 우리가 그 어떤 의미에서건 <반 예술>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술의 이름 아래서이다. .....”(1) 환원과 확장이란 실험의 명분이 예술의 테두리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예술 지상의 신념의 일단을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AG가 5년 만인 1974년 자동 해체되면서 75년엔 에콜 드 서울이 출범하였다. 에콜 드 서울은 어떤 의미에선 AG가 펼쳐 보인 완성한 실험의 바탕이 있었기에 차분하게 우리 미술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새로운 문에 들어설 수 있었다고 본다. AG에서 에콜 드 서울로 연결되는 정신적 맥락은 무엇보다 엘리트 의식의 공유라 할 수 있을 듯하다. 한 시대의 미의식을 대표한다는 자의식이 강하게 드러났던 것이 에콜 그 서울의 특징이기도 했다. 에콜 드 서울은 기존의 그룹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였다. 해마다 작가를 초청하는 형식을 취했다. 구성체는 항상 유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참여 작가들은 매 번 새로운 멤버로서 출품하는 셈이었다. 기존의 그룹이 갖는 타성을 벗어나자는 의도에서였다. 이일은 작가 선정에 깊이 관여하였다.

70년대 중반은 주지하다시피 일본과의 교류전이 활발히 펼쳐졌다. 특히 우리 현대미술의 일본전이 빈번하였다. 이즈음 일본을 중심으로 한국의 현대미술이 백색파니 단색파란 명칭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 단초는 75년 일본 동경화랑에서 열린 <한국의 5인의 작가, 다섯 가지 흰 색 전>이었다. 당시 전시 서문을 쓴 나카하라 유스케는 “이 화가들의 작품을 보면 흰 색은 화면 색채로서의 하나의 요소가 아니라 회화를 성립시키는 근원적 요소인 것처럼 여겨진다....”고 했을 때 흰 색은 단순한 색채 개념이 아닌 그 무엇으로 암시하였는데, 이일은 이를 받아 “요컨대 우리에게 있어 백색은 단순한 하나의 빛깔이기 이전에 백이라고 하는 하나의 우주인 것이다. 실제로 우리에게 있어 백색은 그 어떤 물리적 현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라고 하였다. 한국 현대 미술에 내재되었던 정체성의 문제를 조심스럽게 시사한 것이었다. 우리 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그의 확신은 88년 워커힐 미술관에서 열린 <현대 회화 70년대의 흐름 전> 서문에 다시금 피력되고 있다. “....우리의 추상 회화는 같은 극동권의 미술의 미술에 하나의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에게는 한국에서 새롭게 태동하고 있는 추상 회화의 물결이 미니멀 아트가 제기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 보다 본질적으로 그리고 한국 고유의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비추어진 것이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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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과 가장 밀착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위상은 입체파 시대 작가들과 하나로 어우러졌던 시인 아폴리네르와 막스 자콥과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이들 시인들의 풍부한 감수성이 작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듯이 이일 역시 주변의 작가들에 많은 감화를 주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대미술에 있어 비평가의 역할이 얼마나 주요한가를 그는 누구보다도 절실히 의식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그의 언급을 이 글의 마무리로 대신한다.
“....주지하다시피 전후 미술의 움직임에 있어서의 미술평론가들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앞으로도 그러한 상황은 더해 가면 했지 덜 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또 오늘의 미술양상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새삼스러운 일이기는 하나 비평이라는 낱말은 위기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서처럼 이 두 가지의 동떨어진 듯이 보이는 개념이 일체를 이루고 있는 예도 드문 듯싶다. 그만큼 오늘의 미술은 송두리째 위기의식과 대결해야하고 또 작품은 각기 투철한 비평의식에 일관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물며 미술평론가의 입장에 있어서랴......오늘의 미술 움직임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와 과감한 비평자세,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투철한 비평적 비전의 확립 - 바로 이것이 우리나라의 현대미술에 대한 평론가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동시에 다할 수 있는 길이라 믿는다.“ (4)


(1) <확장과 환원의 역학> 이일 <현대미술의 궤적> 1974 동화출판사 237 쪽
(2)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개의 흰 색전> 카탈로그 1975 동경화랑
(3) <현대회화 70년대의 흐름전> 카탈로그 1988 워커힐미술관
(4) 이일 <현대미술의 궤적> 1974 동화출판사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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