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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화의 전통과 실험

오광수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한 남종 문인화의 맥은 소치, 미산, 남농으로 이어지는 갈래와 의제로 이어지는 갈래가 있다. 이 두 맥은 호남 예단을 대표하면서 많은 문하를 배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허달재(4.11 - 4.25, 박여숙화랑)는 의제의 손자로, 호남 남종 문인화의 한 축을 지탱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가다. 그는 가업으로 의제미술관을 꾸려가고 있기도 하다. 옛말에 큰 나무 밑에는 다른 나무가 자라지 못한다고 했다. 거장 아래서는 좀처럼 이를 능가하는 재목이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 연유인지는 모르나 의제와 남농 문하에선 많은 후진이 배출되었으나 아직 의제나 남농을 능가한 작가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아마도 의제나 남농풍은 많으나 그것을 벗어나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열어가고 있는 작가가 드물다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이 같은 상황에서 허달재의 작업이 인상적으로 보이는 것은 거장들의 무거운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 만의 고유한 세계를 열어가려는 의지가 선명히 부각되고 있기 때문에서이다. 그의 작업은 남종 문인화의 화맥을 이어가면서 그 속에 안주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운 방법을 가다듬으려는 노력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가 선택하고 있는 화목은 전통적인 문인화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작업은 전통적인 방법과는 다른 접근을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전통의 커다란 문맥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새로운 해석을 통해 접근하려는 점이다. 사군자의 화목이 중심이 되면서 어디에서고 전통적인 관념의 취향은 찾아볼 수가 없다. 어떤 의미로 본다면, 남종 문인화가 현대적 회화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루한 관념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허달재의 작품이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현대 회화로서의 문인화를 어떻게 가꾸어가야 하는가란 의식을 선명히 보여주고 있음에서다.




문인화는 소재에 앞서 그리는 방식이 있고 그리는 방식에 앞서 그리는 이의 정신 자세에 참다운 작화의 근거를 두고 있다. 매화냐 국화냐에 앞서 매화와 국화를 어떻게 그렸느냐를 먼저 따지게 되고 그것에 앞서 그린 이의 정신적 자세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문인화를 일반적인 회화의 수준에서 보지 않고 특수한 영역으로 치부하는 요인이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나친 고답적인 정신세계로 흐르게 되면 그것은 또 하나의 관념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 될 것이다. 부단히 관념의 벽을 허물고 현대적 리어리티를 지닐 수 있는 데서 문인화의 현대적 존재 양식을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본다. 허달재의 작품에서도 이 같은 리어리티를 발견하게 된다. 구체적인 상형에 얽매이지 않고 운필의 리듬에 자신을 내맡기는 자유로운 의식이 그의 회화적 리어리티를 대변해주고 있다. 화면 속에 창문 같은 사각의 형태를 삽입한다든지 문자를 대상과 같이 운필화 한다든지 하는 여러 시도가 때로는 강박적인 실험의 산물처럼 보이는 점이 어색하지만 문인화의 형식적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은 높이 사야할 것으로 본다.

기운 찬 선획의 자유로운 구성과 흐드러진 농묵의 즉흥성이 어우러진 배준선의 <정원을 보다>전(3, 22 - 28, 공평아트 센터)은 특별한 소재 의식이 없으면서도 주변의 단면이 훌륭한 화면으로 채워지고 있다. 뜰을 내다보면서 먼저 눈에 띄는 화분을 전체로서 화면에 담는 대담한 포치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자유롭게 흐르고 맺히는 운필의 구사가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는다. 배준선 역시 남종 문인화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형식의 틀에 매이지 않을려는 의도가 선명히 드러난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정원은 전체로서의 정원이 아니라 단면이다. 그만큼 소재에로 향하는 시선의 밀도가 강하게 전해진다. 그가 구사하는 운필은 여유로우면서도 날카롭다. 빠른 호흡을 느끼게 하면서 식물이 갖는 풋풋한 정감이 붓길을 타고 전해진다. 먹의 농담과 운필의 어우러짐이 두드러진다. 화초가 갖는 설명적인 요소가 부단히 지워지는 것도 이 같은 표현에 연유됨이다. 오히려 이 같은 자유로운 구사를 더 밀고 나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김영호의 <머무르다>(3, 22 - 28)전은 명제의 암시성을 떠올리지 않아도 무언가 고여 있는 삶의 응어리를 보는 느낌이다. 그의 화면은 대단히 구체적이면서도 동시에 대단히 비구체적인 요소를 머금고 있다. 실내에는 의자 하나가 놓이고 의자 위로 매달린 바지가 늘어져있는 상황이다. 벽체와 바닥은 때로 아라베스크한 타일의 조립으로 공간 자체가 현대인의 생활공간임을 쉽게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사람이 있었던 흔적만 남아있고 공간은 완전히 비어있는 상태다. 비어 있다기보다 걸린 바지를 통해 부재의 확인과 더불어 조만간 채워질 기대에 부풀게 한다. 바지나 의자는 신체성이 강한 사물이다. 인간이 있음으로해서 존재가치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신체의 주인공은 없고 그가 사용했던 사물만이 극명하게 우리 앞에 놓여진다. 그것들이 신체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현실에서의 부재가 안타까움을 증폭시킨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존재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의 관계에 대한 자기검증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래서 빈 바지와 비어있는 의자는 떠나간 존재에 대한 절망과 다시 돌아올 기대로 긴장감을 고양시킨다. 실내의 구석을 약간 높은 사선의 각도에 바라본다는 시점도 심리적인 긴장감을 유도해주고 있다. 그러나 어쩐지 그의 화면에선 심각한 부정적 이미지보다는 약간 장난기가 있는 해학성이 두드러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말하자면 심각하기보다 빙그레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자칫 심각해질 수 있는 상황을 이렇게 경쾌하게 처리해주는 것도 만만치 않는 기법이다. 그러나 기발한, 또는 신기한 소재에 치우치다 보면 정작 내용과 형식의 균형이 와해되고 그만큼 작품으로서의 완성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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