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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의 힘- 한국화 비젼 2006전에 -

오광수

한국화의 힘
- 한국화 비젼 2006전에 -

1
한국화는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면서 이른바 민족적인 형식으로서 자신을 가다듬는데 일정한 노력을 경주해왔다. 일제 강점기를 통해 왜곡된 한국화의 모습을 되찾는 데 있어 가장 절실했던 과제는 왜색탈피와 민족미술 건설이었다. 일제 강점기를 통해 침투해온 일본화의 감성과 방법의 침윤은 해방이 된 상황에선 불식해야할 가장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적지 않은 미술 지망생들이 일본에 유학 일본화과를 다니지 않을 수 없었던 교육적 환경과 더불어 관전이었던 조선미술전람회의 동양화부가 한국인과 일본인이 동시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화의 감성과 방법의 침윤은 의식, 무의식으로 진행되었다. 해방이 되면서 가장 먼저 제기되었던 미술계의 당면 문제가 왜색탈피였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시대적 요청에 다름 아니었다. 이는 미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 걸친 친일적 요소의 추방과 맥을 같이 한 것이었다. 왜색을 몰아내는 한편 그 대안으로서 민족미술의 건설이 제기된 것도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미술이 어떤 형식과 내용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담론이 형성되지 못한 채 절실하지만 공허한 구호로 머문 것이 되었다. 민족미술의 건설이란 테제는 우리 고유한 미술양식을 새롭게 확립하자는 것이었는데 정작 이에 따른 구체적인 실천방안이 제시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응당 창작가와 이론가가 결속되어 꾸준한 논의와 실험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획득되어야하는 문제인데 이를 추진할만한 제도적 장치는 고사하고 구심이 될 만한 작가들의 결속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개별적인 노력과 교육 현장을 통한 모색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먼저 개별적인 작가군은 김기창, 박래현, 이응로, 김영기 등의 작품 활동이 이에 상응되고 있으며, 교육 현장은 46년에 문을 연 서울대 미술과의 동양화전공에 김용준, 장우성 두 사람의 교수에 의한 새로운 방법의 시도가 여기에 해당된다.

김기창, 박래현은 부부작가로서 이미 해방 전부터 유망한 신진으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김기창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과 최고상을 연이어 수상함으로써 일찍이 추천작가가 되어 있었으며, 박래현은 동경여자미술학교 재학 시부터 조선미전에 출품 역시 특선을 차지한 유망한 재원이었다. 이들은 해방이 되면서 지금까지의 일본화풍을 탈피하고 필선의 자유로운 구사와 대담한 구성을 시도함으로써 민족미술의 형식적 논의에 가장 상응되는 방법을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이응로는 문인화를 통해 조선미전에 등단하였으나 나중에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신남화의 영향을 받고 돌아왔다. 해방이 되면서 그의 작풍은 수묵 위주의 대담하고도 거친 표현을 구사하였다. 특히 그는 현실적 모티프를 즐겨 다룸으로써 시대적 리어리티를 화면에 구현하려는 노력을 지속해보였다. 김영기 역시 활달한 운필을 구사하면서 자연을 요약 표현하는 조형적 모색을 시도해보였다.

김용준, 장우성이 맡은 서울대 동양화 전공은 먼저 필선의 중요성을 고취하면서 수묵 담채의 간결한 조형성을 추구했으며 서울대에 모였던 젊은 동양화 지망생들은 자연스럽게 이들의 감화를 받아들였다. 형식적으론 문인화풍의 현대적 해석에 해당되는 이들의 방법은 도안풍의 왜색의 방법을 지양하고 필선과 수묵의 본질적인 가치를 재인식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에 의해 뿌리내려진 방법은 이후 세대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하나의 맥락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서울대를 나온 제1 세대와 이를 이은 2세대까지 이와 같은 화풍은 견실하게 이어졌다.
개별 단위로 민족미술에 대한 탐구를 보였던 작가군이 하나의 결집으로 나타난 것이 다름아닌 57년의 백양회였다. 김기창, 박래현, 김영기, 이유태, 조중현, 김정현, 천경자, 허건, 박생광 등에 의해 결성된 백양회는 해방 이후 동양화 단체로는 가장 괄목할 만한 활동을 펼쳐보였다. 이들은 서울에서만 전시를 갖는 것이 아니라 지방에서도 순회 전시하였으며, 일본과 대만, 및 홍콩 등지의 동남아에도 진출하여 해방 후 국제교류의 물꼬를 튼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해외전을 통한 산물이 한국화란 명칭이었다. 일본과 대만의 미술가들이 백양회 멤버의 작품을 가리켜 이는 한국에만 존재하는 그림의 형식이란 의미에서 한국화란 말을 사용하였고 이를 받은 백양회 멤버들이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점차 보편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백양회는 이념적인 면에서 통일된 양식을 보여주고는 있지 않으나 전통적인 관념의 틀을 벗어나 현대적 조형으로 동양화를 새롭게 가꾸자는 데 있어서는 공통된 유대를 지니었다. 따라서 방법상으론 다양한 국면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박생광, 천경자가 채색을 위주로 한 방법을 지속시켰는가 하면, 김기창, 박래현은 대상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실험을 구사하였다. 김영기, 김정현도 수묵에 의한 표현의 모색에 현대적 감각을 적극적으로 원용한 방법을 지속해보였다. 이 외 허건, 조중현, 이유태 등은 전통적인 화제에다 현대적 해석을 구현하는 시도에 있어 참신성을 고수하였다. 어떤 단체에도 가담하지 않았던 이응로의 개별적인 시도 역시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큼 대담한 것이었다. 59년 도불전을 전후한 시기의 작품은 반추상을 거쳐 추상에 이르는 것이었다. 어떤 의미로 보면 동양화에서 추상을 가장 먼저 시도한 이는 이응로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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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제1 세대는 46년 서울대에 들어가 6,25동란을 전후해 배출된 작가군을 지칭한다. 서세옥, 박노수, 권영우, 장운상, 박세원이 그들이다. 이들의 방법은 약간의 격차는 있으나 김용준, 장우성에 의해 뿌리내려진 수묵 담채 위주의 신문인화풍을 근간으로 하면서 현대적 조형감각을 구사한 것으로 고답적이면서도 현실감각을 잃지 않은 것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뒤이언 세대들과 같이 동양화의 새로운 모색이란 시대적 의식을 추구함으로써 전통이란 무거운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동양화단에 일대 변혁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이 묵림회의 출현이었다. 서세옥, 민경갑, 송영방, 안동숙, 남궁 훈, 정탁영, 최종걸, 신영상, 심재영 등이 중심 멤버로 참여하였다. 백양회가 해방 후 최초의 동양화의 현대적 그룹이라고 한다면 묵림회는 60년에 들어서면서 등장한 또 다른 혁신적 단체였다. 백양회가 과격한 실험의 추세로 진행되면서도 구체적인 이미지를 탈각하지 않은 수준이었다면, 묵림회는 이미지를 탈각, 순수한 표현의 자립성을 구가한 최초의 단체였다고 할 수 있다. 수묵의 흘림과 뿌림, 파묵의 대담한 구사 등 지금까지 동양화에선 엿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방법을 구현해보였다. 묵림회가 출범한 60년은 우리 현대미술 전반에 걸친 변혁의 물결이 파상 높게 진척되고 있을 무렵이기도 하였다. 뜨거운 추상미술이 서양화단을 휩쓸고 있을 무렵이니까 묵림회의 혁신적 표현도 시대적 기운과 견인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서 동양화에도 비구상이니 추상이니 하는 용어가 자연스럽게 통용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국전의 구상, 비구상 분리에 동양화도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한국화에서의 비구상 또는 추상의 개념은 서구 현대미술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한국화 자체 내에 이미 추성성이 내재되어 있었다는 내재설이 있다. 사의의 예술형식이란 한국화의 근원에 소급한다면 비구상적 방법은 극히 자연스러운 발아현상이란 주장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60년대란 시대적 기운을 떠올려보면 내재성의 자각보다는 외부로부터의 영향이 더 큰 것이 아니었나 본다. 어쨌거나 비구상의 등장으로 인해 표현의 진폭이 다양한 국면으로 진척될 수 있었으며 고식적인 내용성이나 방법의 진부성을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같은 측면에서 본다면 60년은 전시대와 획연히 구별되는 새 시대의 출발의 지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70년대에 들어와 한동안 풍미한 실경산수의 활발한 전개도 전시대의 전통을 새롭게 이어받자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시각에서 실경의 의미를 재해석하자는 것이었다. 우리 주변의 자연의 재발견이란 차원에서 본다면 일종의 문화적 자각현상에 값하지만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정립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새로운 실경산수의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60년대 중반에 와서 묵림회는 해체되지만 묵림회를 통해 전개되었던 새로운 조형체험은 이후 개별 단위로 심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서세옥, 신영상, 정탁영, 이규선 등은 수묵의 표현적 잠재성을 깊이 천착해가는 경향을, 민경갑은 수묵과 채색을 곁드린 반추상적 경향을 추구하여 갔다. 송영방은 간결한 운필의 사경에 점차 몰두해 가는가 하면, 이종상은 수묵에서 다양한 매체로 진전되는 실험의 길을 펼쳐보였다. 국전에만 출품하고 단체에는 가담하지 않았던 권영우는 종이 꼬라쥬란 방법을 통해 독자적인 세계로의 침잠을 보여주고 있다. 박노수는 박세원 등과 같이 한때 청토회를 만들어 활동하였으나 단체보다는 개별 단위의 활동이 두드러지는 편이다. 박노수는 서울대에 들어가기 전에는 청전의 문하에서 수학했기 때문에 어느 면 청전의 감화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청전문하에선 조평휘, 감동수, 하태진 등이 배출되었고 서울대의 심산문하에선 임송휘, 이열모 등이 나왔다. 이인실은 실경을 서양화풍으로 그리는 독자한 방법으로 일반적 산수화의 문맥에서 벗어나고 있다. 해방전부터 활동을 시작한 안동숙은 다양한 실험을 통해 회화로서의 동양화를 모색하였다. 김기창과 천경자의 영향을 받은 작가로는 유지원, 오태학이 있다. 심재영은 독특한 안료의 실험 위에 자신의 방법을 모색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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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한국화의 세대를 구분하자면 60대 후반에서 80대에 이르는 중진, 대가의 이른바 올드 제네래이션이 있고, 30대 중반에서 60대 초반에 이르는 중간 세대 - 미들 제네래이션이 있으며 30년대 중반 이후에서 20대에 이르는 신진세대 즉 뉴 제네래이션을 구분지울 수 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올드 제네래이션에 비해 미들 제네래이션은 내용상에나 방법상에 있어 훨씬 다양성을 띠고 있다. 이 점은 뉴 제네래이션에도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다. 세대가 내려올수록 의식의 다변화와 실험의 진폭이 그만큼 확대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한국화의 위상이 과거의 양식 위주에서 벗어나 현대회화로서의 자신을 가다듬으려는 노력의 결실일 것이다. 이와 같은 결실이 있기까지는 개별적인 작가의 노력도 물론이려니와 백양회, 묵림회 같은 단체의 활동, 그리고 80년대에 들어와 일어난 수묵화운동 등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들 제네래이션이 30대 중반에서 60대 중반에 이르는 세대를 아우르고 있어 그 내면에서도 다양한 진폭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올드 제네래이션에 가까울수록 올드 제네래이션과 정신적 공감대가 확연히 느껴지는가 하면 뉴 제네래이션에 가까울수록 신세대의 의식과 유대를 같이 하는 경향이 농후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세대 층의 구획이란 사실 편의적인 것이지 실질적인 것이 못 된다는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세대가 상향될수록 전통에 대한 인식의 새로움과 현대적 방법의 정립을 동시에 모색하려는 경향이 농후함을 목격하게 된다. 우선 형식과 내용상으로 분류해보자면, 매체와 표현의 방법으로 구획이 가능할 것 같다. 수묵을 위주로 하면서도 운필의 자동성과 수묵의 토온의 변화에 따르는 조형성에 치중하고 있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정종해, 조순호,윤여환, 오숙환, 조환 등), 수묵을 기조로 하면서 부분적으로 채색을 원용하는(이철량, 유근택, 왕형렬, 임혜란 등) 경향이 있다. 수묵을 기조로 한 산수는 대개 실경을 위주로 한 경우로 묶을 수 있는데 전대의 산수가 관념과 실경을 적절히 융화한 방법과는 대조를 이룬다. 현실에로 향하는 감각이 훨씬 치열함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이정신, 정하경, 한진만, 안석준, 오용길, 이선우, 나기환 한풍렬 등) 채색은 진채에 의한 방법(이숙자 등)이 있는가 하면 수묵과 채색을 곁드린 이른바 채묵계통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이들의 경향은 매재에 대한 인식보다 내용성에 더 치중하는 경향을 만날 수 있다.(김보희, 김진관, 주민숙 등) 매체의 적극적인 원용은 그만큼 실험성이 농후하게 드러난다.(김수길, 성찬경, 차영규 등) 오늘날 통용되는 믹스 미디어의 개념은 이미 70년대부터 일부 한국화가들에 의해 시도된 바 있다. 그러한 경향은 신진 세대로 이어지면서 더욱 적극적인 양상으로 전개된다.


오늘날 신세대의 작가들에서 발견되는 한국화에 대한 인식은 크게 두 개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한국화를 우리 고유한 양식으로 인식하고 있는 부류와 굳이 한국화란 틀 속에 갇히고 싶지 않다는 부류가 그것이다. 전자가 형식을 뒷받침하는 재료 개념에 신중한 반면, 후자는 형식보다는 내용성에서 현대회화로서의 가치를 모색하고자 한다. 전자는 한국화가 지닌 특수성에 치중해있는 반면, 후자는 현대회화로서의 보편성을 지향하려고 한다. 이 두 가치관의 길항이 오늘날 한국화의 전체석인 풍경 속에 걷잡히는 가장 뚜렷한 당면 과제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를 요약하건데 한국화여야 하는가 한국화이기 전에 현대회화여야 하는가란 문제로 귀착된다. 어쩌면 한국화가 놓인 상황은 다른 어떤 영역보다도 절실한 논의의 대상이 된다. 그것이 단순한 한국화란 영역에 머물지 않고 우리 문화 전체에 해당되는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것을 어떻게 유지 발전시켜야 하는가, 외부의 영향을 어떻게 소화시켜야 하는가, 란 문제는 회화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문화 전반에 걸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문제의식이 있으면 있을수록, 특수성과 보편성의 길항이 있으면 있을수록 오히려 그만큼 긴장감이 높아질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긴장감이 지속될수록 한국화 내부의 힘은 그만큼 신장될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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