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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상과 기념성

오광수

석남(이경성선생의 아호)미술상이 올해로 25회를 맞았다. 이번 수상자는 한국화의 우종택. 이를 기념하는 전시가 모란갤러리(2, 15 - 2, 21)에서 열리었다. 35세 미만의 청년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이 상은 25회를 맞으면서 30명 가까운(한 해 복수의 수상자를 낸 것을 합쳐)수상자를 내었다. 미술상은 많지만 35세 미만의 청년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경우는 이것이 유일한 것으로 파악된다. 청년작가를 35세 미만으로 한 연령 개념은 파리 청년작가 비엔날레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파리가 국제전을 만들 때 기존의 비엔날레들을 의식하여 만든 것이 연령제한의 청년작가였다. 아직 작가로서 기성에 속하지 않는 작가들인 만큼 실험성이 위주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기존의 비엔날레들이 완성된 작가들의 잔치였다면 파리는 신선한 실험의 마당으로서 그 이미지를 구축한 것이었다. 대체로 이 같은 전략은 성공한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처럼 청년 작가란 미완의 작가, 실험의 열기를 대표해주는 작가란 점에서 언제나 신선함이란 수식이 동반되고 있다. 당연히 석남미술상의 후보가 실험성이 농후한 젊은 작가들이 유리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설치나 영상 위주의 이른바 매체 중심의 작가들 경우, 작가로서 지속성이 떨어지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실험이란 시의성에 치우쳐 그의 예술의 미래를 담보하는 데는 그 나름의 위험부담이 있다는 것이 들어났다. 그래서인지는 모르나 근래 석남상 수상자 가운데는 단연 따블로 중심의 작가들이 많은 것이 눈에 띈다.

우종택은 특히 방법적인 면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윤우학의 심사평을 참조하면, “그는 수묵으로 삶에 찌들고 고통 받는 이들의 부실하고 우울하기 짝이 없는 육신의 이미지를 표현하는데 우선의 관심이 있겠지만 그것을 단순한 감상적 메시지의 전달이 아닌, 방법론의 새로운 실험을 통해 표현의 가치를 한 차원 높인 점에서 특히 주목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우종택이 다루고 있는 소재의 범주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인간상 그것도 도시의 군상이다. 소재의 범주가 좁은 만큼 선택의 밀도가 상대적으로 높을 수 있다. <줄서기>로 표상되는 명제에서도 이 점이 간파된다. 줄서는 군중의 모습은 도시 공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속적 단면이다. 줄을 선다는 것은 차례를 기다린다는 것이고 질서를 유지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도시 속의 삶이란 줄서기로 은유되듯이 무언가 끝없이 기다리고 또 질서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우종택이 보여주는 인간군상은 한결 찌들고 우울한 서민들, 도시서민들의 자화상이다. 이들이 하나같이 어느 순간에 정지된 듯 고착되는 특징을 들어낸다. 아마도 그것은 탁본과 같은 찍어내는 수법의 응고성에 기인되는 것 같다. 화석과 같이 아로 새겨지는 형상은 그런 만큼 기념성이 두드러진다. 오랜 시간을 통해 마모되어 가는듯한 표현의 고졸한 미감은 시간의 내재성을 함축하면서 깊은 여운을 남긴다.

우종택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미국의 작가 레온 골럽의 사회성이 짙은 작품이 떠오른다. 미국의 사회적 문제, 예컨대 인종갈등, 반전, 권력에의 저항 등 주제의식이 강한 골럽에 비해 우종택은 사회성이 반영되면서도 너무 평면적이란 인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평면적이란 주제의식에 뿐 아니라 화면 구성에 있어서도 나열적인 결함을 포함한다. 인간 실존에 대한 보다 치열한 접근이 내용과 더불어 구성에도 부단히 작용되었으면 하는 주문이다.




백원선(2, 18 - 2, 27 노화랑)은 오랫동안 종이(한지)를 바탕으로 한 구조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내면의 차원의 형성, 또는 이미지의 문제 등 새로운 시도를 가하고 있다. 이번 작품들은 지금까지 시도해오던 꼴라쥬와 데꼴라쥬에 의한 화면구성의 계열과 개 또는 말과 같은 동물을 삽입한 명제 <멈춤>계열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종전의 꼴라쥬와 데꼴라쥬의 방법은 작은 원형의 패턴이 화면에 일정하게 반복되는 구조로 구체적인 상형성과 암시적인 표현의 결합이 전면화 하면서 짙은 여운을 자아내고 있다. 바탕의 구조는 일관되면서 부분적으로 이미지가 서식되는 <멈춤>계열은 개와 말이란 구체적인 동물상이 데꼬라쥬의 방법에 의해 구현된다. 뛰는 말이나 개가 한결같이 정지된 상태로 떠오르고 있어 마치 각인된 것 같은 기념성이 표상된다. 유독 정지 상태를 강조한 것은 지시적인 내용성보다 암시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시사함이 분명하다. 단순히 종이를 발라오리고 다시 부분적으로 뜯어내는 방법상의 구조에 곁들여 스크레치 같은 표현이 가미되고 있음도 새로운 시도로 보인다. 변화 없음에서 변화를 유도하는 그의 작업은 안으로 집약되는 심화의 또 다른 양상임이 분명하다.





김범석(2, 22 - 3, 3 관훈갤러리)이 내세운 표제는 <산에 오르다. 빈들에 서서>이다. 표제는 작가의 방법의 반영이다. 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점, 또는 빈 밭에 서서 주변을 바라보는 각도가 화면을 지배한다. 바라본다는 조망감이 강조되면서도 정작 거리가 없고 바로 서 있는 자리에서 풍경이 이어진다.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풍경 속에 있는 위치가 강조되고 있다. 그런 만큼 전체로서 인식되는 시각의 압축성이 촘촘한 붓질에 의해 극명하게 들어난다. 서문의 류철하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산과 길이 구분되지 않는 야생의 들녘을 빈틈없는 필치로 묘사해 보여줬던 그의 화면은 조방하면서도 세밀하고 압축적이다.” 그 역시 방법적인 면에서의 시도가 두드러져 보인다. 수묵과 수묵의 번짐을 제거하는 호분의 사용을 통해 표현의 압축성을 높이고 있음이 그것이다. 다양한 재료의 수용과 새로운 재료의 원용은 그만큼 표현의 진폭을 기하는 것이 된다. 한국화 분야에서 일고 있는 이 같은 시도는 환영할 만한 것이다. 그동안 한국화가 지나치게 고식적인 방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내용에서 보다 재료에 대한 인식의 고루성에 기인되었다는 점을 젊은 세대가 자각해가고 잇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재훈(3, 7 - 3, 18 아트 포럼 뉴 게이트)이 그리는 인간상은 지극히 암시적이다. 암시적이라기보다는 익명성이 강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인간상이면서도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지워진 상태가 아니면 부분적으로만 들어나기도 한다. 지워지고 반쯤 들어난 인간의 모습은 그런 만큼 강한 상황성을 유도하고 있다. 어눌한 손의 동작이 보이는 실존의 조건은 먼저 말할 수 없는 긴장감을 동반한다. 단순히 보여 지는 작품이 아니라 작품 속으로 관객을 흡입한다.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당신은 직시할 필요가 있다는 듯 다소 강제성을 띈다. 오랜 시간에 마모된 것 같은 잔흔의 얼굴들은 차돌처럼 단단하다. 구체적으로 들어나지는 않지만 언젠가 뚜렷한 모습으로 떠오를 것 같은 감추어진 내연이 실존의 상황에 대비된다. 그의 작품은 방법적인 면과 작품이 내재한 메시지가 어떻게 조화롭게 어우러지면서 표현을 대신하는가가 관건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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