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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김차섭을 생각한다

윤진섭

책상 위에 놓인 한 권의 책을 바라본다. 『구비치며 합류하다』란 제목의, 화가 김차섭·김명희 부부의 삶과 예술을 기록한 책이다. 부제가 ‘화가 김차섭, 김명희의 향기로운 삶’이다. 청현문화재단에서 펴낸 이 책은 2015년에 이 두 작가의 거처인 뉴욕 소호에 있는 로프트 스튜디오와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내평리 작업실에서 구술(口述)을 통해 기록한 것이다.

표지를 보니 내평리 작업실 계단에 앉아 환하게 웃는 부부의 모습이 다정하고 평화롭다. 그런데 김차섭은 지금 세상에 없다. 2022년 8월 28일에 세상을 떴다. 1940년에 일본 야마구치(山口)현에서 태어나 어릴 적에 부친의 고향인 경주로 이주한 후, 80여 평생을 스튜디오가 있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작업에 몰두해 온 김차섭이 영면에 든 것이다. 평생토록 제작한 상당한 양의 작품을 남겼다. 이제 의미의 덩어리인 이 작가의 작품들에 대한 해석과 보존이 지상에 과제로 남겨졌다. 과연 어떻게 이를 풀어갈 것인가.



내평리 스튜디오 돌계단에 앉아 망중한을 즐기는 김차섭, 김명희 부부 작가
『구비치며 합류하다-화가 김차섭 김명희의 향기로운 삶』
(청현문화재단, 청강문화산업대학 출판부, 2016)


이 글을 쓰는데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김차섭기념사업회(이사장: 김명희)가 작고 1주기 추모 행사를 8월 19일에 연다는 것이다. 아무쪼록 이번 행사를 계기로 작가 김차섭의 삶과 예술을 기릴 수 있는 다양한 방법론들이 논의되기를 기대한다.

김차섭은 1967년 파리비엔날레를 비롯하여 68년 ‘회화68’전, 70년 ‘AG’전, 71년 ‘제11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참가 등을 통해 초창기 한국 실험미술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1969년에는 김구림과 함께 <매스미디어의 유물>이란 국내 최초의 메일 아트를 시도했다. 세계에서 주목을 받는 ‘K-ART’의 여세를 몰아 얼마 전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끝난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전이 9월에 뉴욕의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리게 되는데, 김차섭의 이 작품이 출품됐다.

키가 큰 김차섭에게는 언제나 말을 타는 유목민족 후예의 기상이 흘러넘쳤다. 어조는 강했고 신념에 차 있었다. 2018년 7월 17일, 김차섭·김명희 부부의 공동작업실 겸 살림집인 내평리 폐교를 찾았을 때, 김차섭은 몽골리안 기마민족을 둘러싼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한 손에 딱 들어오는 돌멩이의 크기가 7.2cm인데, 그것은 희한하게도 야구공의 크기와 일치한다는 것 등등 그는 문화의 원형을 이 수치에서 찾았
다.

“담배갑도 그렇고 초기 핸드폰도 그렇고 손에 잡기 딱 좋은 크기지.....(중략).....다윗(David)이 골리앗(Goliat)을 돌팔매질로 이겼다고 하는 것이 한 단계 넘어선 인류학적 진보의 역사인데, 돌멩이 크기도 손에 딱 들어가지, 야구라는 것도 돌멩이 던지는 것과 같은 거야.”
『구비치며 합류하다』 p.259-261에서 인용

이처럼 김차섭은 일상생활에서 발견한 평범한 사물들에서 문화의 원형을 찾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화가라기보다는 철학자, 사색가, 미학자에 가까웠다. 김차섭이 남긴 방대한 양의 작가 노트에는 이처럼 평범한 사물들에서 도출한 미의 원리, 기하학에 관한 사유, 한국의 미의식과 관련된 사고의 흔적이 담겨있다. 그는 특히 ‘π’와 같은 풀리지 않는 신비한 수학의 세계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지금 한 장의 그림을 보고 있다. ‘회화68’전에 출품한 김차섭의 <자화상>(1968)이란 작품이다. 유채로 그린 이 작품은 가로 길이가 무려 2.9m에 달하는 대작이다. 이 그림은 5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사각의 기하학적인 도형들이 배치된 가운데 목 부분이 없는 동일한 형태의 단순화된 인물상들이 각기 다르게 표현돼 있다.

김차섭의 자화상 중에는 한복을 입은 채 해골을 손에 쥔 작품이 있다. 한국인으로서 세계 속에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한 대표작으로 손색이 없다. 말년에 이르기까지 심오한 세계를 화폭에 담고자 한 김차섭. 그는 과연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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