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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만물은 유전(流轉)한다

윤진섭


1995년 미술의 해에 기획한 ‘공간의 반란전’ 도록 표지


“만물은 유전(流轉)한다.”라고 갈파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람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어제의 생각이 다르고 오늘 생각이 다르며, 뜰 앞의 잣나무는 보기에는 똑같아도 1분 전의 것과 지금의 것이 같다고 할 수 없다. 

아주 오래전, 대학에서 미술 공부를 할 때 ‘전위미술(Avant-garde art)’에 푹 빠져 지냈다. 학생 신분으로 70년대 중반 당시 화단에서 꽤 유명한 기성 그룹 ‘S.T’의 일원으로 작품 활동을 했으니, 시쳇말로 겁을 상실한 ‘앙팡 테리블’이었다. 10여 년 연상의 기라성 같은 화단 선배들과 어울리며 작품을 했다. 말 그대로 기고만장이었다. 

틈만 있으면 강의실이나 실기실보다는 도서관에 파묻혀 미술 이론에 관계된 책을 읽었다. 당시는 개념 미술이 풍미하던 시절이었다. 자연스럽게 실기보다는 이론에 치우쳤다. 미술 잡지라야  『공간』, 『계간미술』, 『미술과 생활』 그리고 현대화랑에서 발행한 『화랑』이란 계간지가 다였다. 그런 척박한 환경에서 해외 미술 사조에 대한 지식의 공급원은 『Art in America』, 『Art News』, 『Art Press』 등 구미 잡지와, 일본 잡지인 『미술수첩(美術手帖)』, 『미즈에(みづゑ)』 등이었다. 서양미술 이론서의 번역본도 많지 않은 시절이었다. 따라서 남보다 더 많이 지식을 흡수하고 싶은 사람은 영어를 비롯하여 불어, 독일어, 일본어 등 어학에 많은 투자를 해야 했다. 

당시는 해외여행이 몹시 어려웠다. 유신 체제하의 제4공화국에서 유럽을 비롯한 구미 여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았다. 그 때문에 서구미술에 대한 이해는 피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화단은 국전 중심에서 국제전 중심으로 서서히 옮겨가던 시절이었다. 파리비엔날레, 상파울루비엔날레, 카뉴국제회화제에 작가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이와 관련된 업무는 미협(‘한국미술협회’의 약칭)의 국제분과가 담당했다. 당시 이의 소관 정부 부처는 문화공보부였는데, 해외에서 오는 국제전 업무는 모두 미협에 일임이 되었다. 

당시 전위미술에 대한 나의 관심은 기질과 취향의 문제였다. 청바지를 걸치고 장발을 한 나의 차림새는 일종의 저항과 도전의 표시였다. 서구 지향적 의식의 표출도 한몫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런 기질과 취향이 훗날 나의 길이 된 것 같다. 

그러나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나의 의식도 변했다. 그 전환점은 80년대였다. 이 땅 위의 것들에 관심이 가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화학적 변화가 찾아왔다. 이 무렵부터 시작된 해외여행은 서구를 비롯한 외국의 것과 우리의 것을 비교할 수 있는 안목을 형성시켰다. 90년대를 거쳐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비로소 나의 관점에서 외국의 문물을 바라볼 수 있는 나름의 기준이 생겼다. 억지 논리나 견강부회가 아니라 그냥 편안하게 바라볼 것, 그러나 나의 주장을 위해서 필요한 토대 하나쯤은 만들어야 한다는 깨우침이 있었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전위미술에 대한 관심은 변한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그 내용과 태도는 과거 70년대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삶을 한 바퀴 돌아온 뒤의 그것이 같을 리 없다. 그럼 무엇이 다를까? 겉은 부드러우면서도 속은 강한 것, 그리고 시선이 나를 중심으로 밖으로 뻗는다는 것. 그것이 다르다면 다르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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