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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성 : 한국 최초 유럽 유학파 이자 근대를 연 화가

김달진

한국 최초 유럽 유학파 이자 근대를 연 화가

배운성(1900-1978)

  



가족도, 1930~35년


 배운성은 1900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려운 가정환경 속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대부호였던 백인기 집안의 아들 말동무 겸 시종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후 백인기 아들 백명곤과 함께 일본으로 유학을 가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1922년 독일로 유학 가던 도중 우연히 들린 프랑스 마르세이유 박물관에서 배운성은 미술에 눈을 뜨게 된다. 그 후 경제학이 아닌 미술을 공부하기로 결심하며, 그는 1925년 베를린 국립미술학교에 한국인 최초로 입학했다.




모자를 쓴 자화상, 1930년대



빨래하는 여인들, 1930년대


 1927년 파리 살롱 도톤느에서 〈자화상〉으로 입선하였고, 1930년 베를린 쿠틀리트 화랑에서의 첫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을 계기로, 독일 문화원 미술분과 회원이 되었다. 1933년 폴란드 바르샤바 국제미전에서 〈밀림〉,〈여인의 초상〉,〈자화상〉으로 1등상을 수상하는 등 유럽화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작품활동을 이어나갔다. 

   

 배운성의 작품은 그 당시 유럽에서 볼 수 없던 우리 민족의 특색을 살려 나타내었다. 다양한 기법으로 작품을 그려내었는데, 부드러운 표현과 은은하고 아름다운 색상 조화로 한국의 전통의상, 풍습 및 문화들을 소재로 그려내 주목을 받았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가족도>, <모자를 쓴 자화상>을 들 수 있다. <가족도>는 배운성이 백명곤의 주문에 의해 백인기 가족을 회상하며 그린 작품이다. 1999년 프랑스 유학생이던 전창곤에 의해서 기적적으로 배운성의 가족도를 포함한 40여점의 작품이 다시 빛을 발하게 되었다. 그 중 <가족도>는 2013년에 국가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될 정도로 높은 완성도로 근대회화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인정받았다.

 



한국의 어린이,1938 



 배운성을 향한 비판적인 시선을 빼놓을 수 없다. 유럽에서 활동하던 그는 1940년 2차 세계대전 발발하며 서울로 돌아와 운성회화연구소를 운영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이 시기에 일본 친일부역행위, 내선일체 찬양하는 무용극 <부여회상곡>의 무대미술 및 의상을 제작하고, 징병제 실시 기념 신문삽화 게재 및 결전미술전람회 출품 등으로 친일활동을 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홍익대 초대 미술학과장으로 1949년 1회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했지만 한국전쟁 때 월북하여 1956년까지 평양미술대학의 출판화 강좌 상급교원으로, 1957년 이후 국립미술출판사 소속 화가, 1959년 이후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에서 미술가로 활동하였다. 




줄다리기, 1930년대

 

 월북 이후 배운성은 북한 현대 판화 미술사 발전에 크게 기여한 화가로 대중의 생활을 반영한 다양한 판화를 제작하였다. 북한 미술계에서는 그의 작품들이 대중의 생활, 풍습을 잘 묘사하였다고 평가했으며 김일성의 판화 초상화를 처음 제작을 맡았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그의 작품들은 간단한 구성 속에 주제를 뚜렷하게 하며 나머지를 과감히 생략해 여백을 드러내었고, 선을 기본으로 색을 적절히 사용하여 나타냈다.



  귀가,1938


 배운성은 1978년 타계하였고 대한민국에서 “월북화가”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금기시되다가 1988년 월북 예술인 해금 조치 이후에야 언급되기 시작했으며, 사진 자료로만 일부 알려졌던 유럽 시절의 작품이 프랑스 유학생 전창곤에 의해 발굴되었다. 2001년에 국립현대미술관 주최로 《배운성전》을 열려 대중들에게 다시 조명되었고, 2020년 웅갤러리 주최로 《배운성: 근대를 열다》전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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