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한국 현대미술의 국제화에 공헌, 고암 이응노

김달진

한국 근대미술의 대가를 찾아서 (9)

한국 현대미술의 국제화에 공헌, 고암 이응노


지난 2월 이응노유작전이 가나화랑과 갤러리현대에서 동시에 있었다. 갤러리현대는 문자 추상회화 60여점, 가나화랑은 나무조각, 세라믹, 판화를 전시하였다. 이 전시회를 통해 다양한 재료의 폭 넓은 작품세계를 다시 보여주었다. 이에 앞서 지난 2월 갤러리현대에서는 고인의 아들인 재불작가 이융세 개인전이 열려 관심을 모았었다.





고암 이응노(顧庵 李應魯)는 1904년 충남 예산 태생으로 19세 때 상경하여 해강 김규진의 문하생으로 연수한 뒤 일본으로 가서 도쿄 가와바다(川端)그림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하였고 해방 후 홍익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몇차례 개인전을 갖고 50세가 넘은 나이에 재도약을 꿈꾸며 1958년 도불하여 동양미술연구소를 개설하여 문하생을 지도하였다. 1960년대에는 동베를린 사건에 연류되어 소환, 반공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루었으며, 국내 화단과 단절되기도 하였다. 유럽에서 국제전과 개인전을 통해 왕성한 작품활동을 보였다. 1989년 그리던 고국 호암갤러리에서 모처럼 대규모 전시회를 열어놓고 파리에서 85세로 타계하였다. 1994년 다시 호암갤러리에서 회고전이 있었으며 미망인 박인경 여사도 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크게 전반기의 사실적 탐구와 후반기의 다양한 조형실험으로 구분된다. 초기에는 대나무를 많이 그렸고 도불전에는 사실적인 산수화와 시골 서민들의 삶을 화폭에 담았다. 1967년 동베를린 사건으로 2년 6개월 옥중생활을 하면서도 밥알을 모아 신문지에 반죽해 오브제 작품을 만드는 등 치열한 작가 정신을 발휘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문자 추상 작품은 신문이나 잡지를 잘게 잘라 캔버스 위에 붙인 콜라쥬 문자추상기 (1960-65년), 수묵담채와 무채색에 가까운 색채로 문자 형식을 그린 서예적 문자추상기(1960-70년), 짙은 테두리 선으로 각 문자의 이미지를 독립시키고 글꼴을 변형하며 재료도 나무판이나 융 등 다양하게 사용한 구성적 문자추상기(1970-80년)로 나뉜다. 말년에는 인간의 춤을 소재로 도식적 운용을 보였다. 수많은 인간 군상들이 드넓은 광장이나 운동장을 가득 메운채 달리고 춤추고 열광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시리즈는 모든 억압에 대한 집단적 항변으로 또는 자유를 향한 영원한 희구의 몸짓을 담은 메시지이다.


고암의 삶과 예술은 정치적 격동기에 한동안 어두운 긴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작품세계는 동일한 양식의 모방이나 반복적 표현기법에서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탐구와 실험정신을 보여주었다. 특히 우리 고유의 전통적인 미의식을 표현하고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는 새로운 예술세계를 깊이 연구하였다. 다양한 소재와 풍부한 화면 구성 및 창조적인 작가정신이 넘친 거장이었다. 일찌기 남먼저 국제무대인 파리로 건너가 동양적 미의식과 서구의 새로운 경향을 접목시키고 알려 우리 현대미술의 세계화에 큰 공헌을 남겼다.


- 포스틸갤러리 1997년 11월호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