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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상주의 최고봉인 선비형 화가, 오지호

김달진

지난 1985년 10월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오지호회고전>이 열렸다. 그 전시는 유족이 국가에 기증한 작품 34점을 중심으로 초기부터 절필작품까지 151점이 전시되었다. 작품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회였고 3년후에 화집도 발행하였다. 작품 기증이란 쉬운 일이 아닌데 용단이었다.


'빛의 약동! 색의 환희! 자연에 대한 감격-여기서 나오는 것이 회화다. 만개된 복숭아꽃, 오얏꽃, 그 새로이 파릇파릇 움트는 에메랄드의 싹들! 섬세히 윤택히 자라는 젊은 생명들! 이 환희! 이 생의 환희!…' (오지호 김주경 2인화집 1938년)

2인화집에 실려있는 <순수회화론> 글 중 일부분이다. 이 미술에 관한 글은 매우 획기적이고 과학적인 것으로 지금도 평가한다. 젊은 시절 자신의 회화관의 일부로 명료하고도 단호하고 정열에 가득 차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원색화집에는 두 사람의 각 10점씩이 수록 되어 있고 그 속에는 오지호가 과수원에서 그림 그리고 있는 모습을 담은 김주경의 작품이 들어있다.





오지호(吳之湖)는 한국 서양화가로는 처음으로 이 땅의 빛과 대기가 지닌 투명함과 명랑성의 인상파적인 눈을 떴고 이를 바탕으로 작업했던 작가이다. 알다시피 인상파화가들의 주장은 물체에 고유한 색이 있는 것이 아니라 태양광선에 의한 변화로 보고 실외에서 직접 캔버스에 제작하였다. 그는 인상파적 기법이 뚜렷이 드러나는 <과수원 풍경> <사과밭> <5월풍경> <초추> 등 풍경화들을 남겼다. 이 그림들에서 인상주의 그림 특성대로 빛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색채를 분할해서 공간을 해체하고 한순간의 평정들을 분명한 화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는 전 생애동안 햇빛이 풍성한 고향 빛고을(광주)를 떠나지 않으면서 우리 산하에 내리비치는 찬란한 빛과 색채의 하모니를 제작하였다. 1950년대후 작품은 자유분방한 붓터치에 의한 표현주의적 경향으로 나아갔다. 때로는 복잡하고 섬세한 묘사보다 주관적인 요소로 처리하여 자연이 주는 이미지를 강조했다. 그가 즐겨 다룬 항구, 설경, 온실, 정물 등에서 햇빛과 색채에 대한 추구는 계속되었다. 1974년 유럽 여행후에는 <함부르크항> <노르웨이풍경> <북구의 전원> <베니스풍경> 등 이국 정취를 담은 작품도 많다.





오지호는 1905년 전남 화순 태생으로 1931년 일본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했다. 28년 녹향회 창립회원으로 38년에는 한국 최초의 원색화집인 <오지호 김주경 2인화집>을 발간했다. 1948년 광주에 정착하여 이듬해부터 60년까지 조선대 교수를 역임했다. 호남미술 발전을 주도했으며 서양미술의 계몽 민족적 미술의 개척을 위하여 많은 글들을 발표했고 이를 실제 작품으로 실현해냈다. 국전심사위원 예술원회원 등을 역임하였고 1982년 77세로 작고하였다. 구한말 전남 보성군수를 거쳐 한일합방으로 자결한 우국지사의 아들이었다. 


한국화가로 드물게 선비정신과 민족의식을 가진 지식인으로 구상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이론을 겸비한 작가였다. 피카소를 비판한 <피카소와 현대회화>, 구상회화와 비구상 미술은 별개의 예술임을 주장한 <구상회화 선언>등의 논문도 있고 1968년 <현대회화에 대한 근본문제>를 출판했다. 한글만으로 교육하면 천재도 천치가 된다는 신념으로 한자교육 부활에도 노력하였다. 3대로 화업을 잇고 있다. 아들 승우씨는 예술원회원이며 서울, 승윤씨는 전남대교수를 역임했고 광주에서 크게 활동을 하며 부친이 살았던 초가집에서 살고 있다. 손자인 승우 씨의 아들 병욱은 미술평론가로 원광대교수로 재직중이며 상욱은 조각가이다.


- 포스틸갤러리 1997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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