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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자유로의 철조망 풍경

박영택

강변북로를 따라 북으로 계속 직진해 가다가 헤이리 출판단지나 그 위쪽의 헤이리 예술마을 쪽으로 가는 경우가 더러 있다. 전시장이나 그 주변에 자리한 작가들의 작업실을 가는 다소 긴 여정이다. 자유로에 들어설 때마다 나는 좌측으로 이어지는 한강 풍경을 힐끗거린다. 전방 이정표에는 판문점, 개성이란 문구가 쓰여 있다. 그곳은 갈 수도 있겠지만 갈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개성, 평양 등의 문구와 거리를 지시하는 숫자는 환영처럼 다가온다. 고 정주영 씨는 이 도로 위로 소 떼를 몰고 간 적도 있었고 한때 수백여 명의 근로자가 왕래하기도 했다.



자유로의 철조망 풍경 ⓒ박영택


2004년, 총 100만 평 규모의 개성공단 1단계 시범단지에 입주기업 15개사가 최종 선정되어 2005년부터 본격적인 가동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 이 도로를 따라 개성까지의 통행이 자유로워졌다. 이후 125개사의 입주기업과 남한 근로자 800여 명과 북한 근로자 5만 5,000여 명이 함께 일했다. 2013년 개성공단의 총생산액은 20억 불에 이르렀다. 그러나 2016년 2월 개성공간은 제도적이고 물질적으로 전면 중단되었다. 따라서 자유로를 통해 그곳까지 가는 길도 순간 차단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자유로에 설치된 표지판은 개성을 지시하고 있다. 이 도로는 분명 분단의 트라우마를 간직한 곳이다. 이 길을 운전해 갈 때마다 나는 항상 직진을 해서 개성과 평양까지, 아니 그보다 더 위쪽까지 가보았으면 하는 욕망을 꿈꾸다가도 이내 도달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하여간 헤이리에서 볼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오른쪽으로 시야에 달라붙어 따라오는 한강 풍경을 가득 담아두었다. 운전대를 잡느라 저 풍경에 오랫동안 시선을 고정 시킬 수는 없지만 전방을 주시하는 틈틈이 계속해서 한강을 쳐다보는 것이다. 그러나 한강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 가시 같은 철조망과 시멘트벽에 의해 거듭 차단된다. 자유로에 인접한 강가 쪽은 모조리 철조망으로 촘촘히 둘러쳐졌고 일정한 간격마다 초소들이 직립해있다. 유난히 안개가 자주 밀려드는 이 도로에서 불쑥불쑥 출몰하는 저 철조망과 초소들은 무의식 속에서 출현하는 분단의 트라우마와도 같다.

나는 운전을 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 핸드폰 카메라를 이용해 이 장면을 다소 어렵게 촬영했다. 안개는 희미하고 엷게 퍼져있고 그 사이로 태양이 떠 있었다. 우측에는 차갑고 날카로운 철조망이 도열해있다. 순간 정동석이 80년대 찍은 사진 <반풍경> 시리즈가 떠올랐다. 당시 작가는 35mm카메라를 자신의 몸 어딘가에 숨기고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창밖에 자리한 휴전선 근처의 군사시설이나 남한 해안가에 자리한 군사용 철조망 등을 촬영했다. 그곳은 분명 행정구역상 대한민국의 영토이지만 그의 사진 속에 들어와 박힌 풍경들은 어딘지 낯설고 기이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상황을 가장 압축해서 보여주는 초상 같은 풍경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분단 상황에서 살고 있고 우리나라가 분단국가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준 사진이었다. 기존의 풍경개념과는 확연히 다른 차원을 지닌 정동석의 사진은 한반도에서 풍경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선례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사진을 촬영한 날에도 자유로에는 안개가 차올랐고 그 사이로 앞차의 후미 등 붉은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일정한 시간 동안 끝없이 이어지는 철조망과 초소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돌아가실 때까지 북한에 자리한 고향과 그곳에 남겨둔 가족을 그리워한 아버지가 문득 떠올랐다. 끝내 가족의 생사도 모른 채 돌아가셨던 그이를 생각하면 살아생전 함께 차를 타고 이 자유로의 갈 수 있는 마지막 지점까지라도 질주해보았으면 어땠을까하는 회한이 밀려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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