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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환영적 이미지를 제공하는 부엌 등잔

박영택

유제 벽걸이 등잔, 20세기 초


태초에 빛이 있어 사물이 분별 되고 본다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빛이 없다면 사물, 세계는 없다. 어두운 밤은 그걸 증명한다. 어둠에 대항할 수단이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 태양과 달과 별은 빛의 존재를 깨닫게 해준 결정적인 존재였기에 숭배의 대상이기도 했다. 따라서 태양을 상징하던 동심원의 도상은 곳곳에서 출현하며 때로 불꽃으로, 화염문양으로도 등장한다. 한편 이미지의 어원에는 빛이란 단어가 숨겨져 있다. 모든 이미지는 빛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는 그 빛과 더불어 항상 변모하는 질료로 존재한다. 빛에 의해 응고돼, 광물질의 표면처럼 빛나기도 했고, 부서지는 색채의 가루로 소멸하기도 하고 흐린 대기처럼 엷어지기도 한다. 이렇듯 실체를 규정할 수 없는 끊임없는 변모가 바로 세계다. 단단한 질료와 희박한 질료 사이를 오가며 세계는 인간의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색들을 시시각각 발산하고 있다. 이 싱싱하고 파득 거리며 날 것으로서 뒤척이는 세계의 몸은 빛으로 가능하고 그 몸을 포착하려는 것은 모든 미술가의 부질없이 오랜 욕망이었다.

한편 인위적인 조명기구는 빛을 항상 유지하려는 또 다른 욕망에서 나왔다. 콩기름이나 피마자기름 등을 돌의 속 -대개 백석으로 속을 깊게 파 만든 주발형 등잔-을 파내 만든 종지형 조명구에 담은 후 무명실이나 한지 따위로 새 발처럼 네 갈래로 꼬아 세 가닥은 기름이 있는 바닥에 놓고 한 가닥은 가운데 심지로 세워 불을 밝히는 등잔이 가장 오래된 우리네 조명기구에 해당한다. 등잔은 자기나 돌로 만든 잔에 기름을 붓고 심지를 넣어 불을 밝히는 용도를 지칭한다. 일반적으로 식물성 기름을 사용하는데 어촌에서는 어유를, 산촌에서는 산초기름을 썼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백석등잔이나 목제등가, 등잔의 높낮이를 조절하여 사용하는 목제등경(木製燈檠) 및 목재 촛대나 철제·철제은입사촛대, 제등, 조족등 등을 자주 보았다. 등경은 등불을 켜는데 쓰는 등잔걸이를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쓰임이 유사한 등촉구들이 재료에 따라 다양하게 제작되었기에 볼만한 등잔이 참 많다. 등잔은 나무, 도자, 금속 등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구조적 형식은 바닥면과 기둥이란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졌고 따라서 그 형태는 거의 같아 보이면서도 세부에 있어서는 하나도 같은 게 없는 것이다. 그게 퍽이나 흥미롭고 절묘하다. 하여간 등잔은 사용 시 편리성을 고려한 기능성과 조형적 미감이 잘 조화된 공예품이다. 
몇 년 전 교토의 골동 상가를 돌다가 허름한 한 가게에서 조선 시대 부엌 등잔을 봤다. 국내에서도 간혹 볼 수 있긴 했지만 상태가 완전했고 연대도 제법 좋아 보였다. 무엇보다도 가격이 좋았다. 나는 다른 어떤 등잔보다도 허름하고 침침했던 부엌을 환히 밝힐 수 있도록 고안된 이 부엌용 걸이등잔이 소박해서 좋다. 일명 ‘새 등잔’이라고 불리는 이 등잔의 높이는 21.3cm다. 참으로 아담한 크기다. 마루나 찬방의 벽에 걸어 놓을 수 있도록 고안되었으나 형편에 따라 바닥에 놓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이동식 구조로 되어 있는데 둥근 접시형의 받침과 받침 뒤편에 세워지는 걸쇠용 장식대 그리고 등잔이 얹히는 등잔거치대의 세 부분이 결합된 구조로 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이 부엌등잔의 특색은 바로 걸이대의 장식 부분이다. 서로 마주 보며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새의 형상이 아름답고 특별한 조형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불을 켠 등잔을 올려놓는다면 그로 인해 새의 그림자가 벽면에 길게 드리워지면서 너울거렸을 것이다. 그러면 실제 나뭇가지에 앉아 울어대는 작은 새들의 모습과 소리가 환영처럼 떠오르는 듯도 하다. 그림자놀이를 겸하고 있는 이 매력적인 이미지를 선사하는 등잔을 보고 있노라면 멋을 아는 우리 조상들이 안목에 마냥 마음이 기운다.

이만한 조명기구를 어디서 구할까? 이 새 장식은 신라 금관에 달린 곱은 옥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철판 모양의 철기인 가야시대 미늘쇠에 날카로운 날 대신 고사리나 새 모양으로 장식한 미늘(刺)과 유사하다. 그런 장식이 달린 미늘쇠는 의장 행렬이나 전쟁의 깃대처럼 장대에 끼워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함안 도항리 유적(함안 도항리 10, 13호 무덤)에서 출토된 미늘쇠 양쪽에는 새 장식이 달려있는데 이 새 모양 미늘쇠는 가야와 신라 권역에서만 출토되고 있다. 새 등잔의 좌우대칭으로 늘어선 새와 완전히 일치하는 형식이다. 가야 권역에서 출토된 미늘쇠의 새장식이 조선 시대 부엌 등잔까지 이어져 오고 있음이 경이로운 것이다. 나는 가끔 이 새 등잔의 등잔 거치대에 작은 양초를 켜놓고 어두워진 연구실에 가만히 앉아서 저 작은 새가 드리우는 그림자를 바라보곤 한다. 기묘한 환영과 환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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