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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청노새 목에서 짤랑대던 그 말방울

박영택

 1980년대 초반에 대학에 들어간 나는 암울하고 혹독한 시국 속에서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교내 벤치에는 사복경찰들이 죽치고 앉아 있고 교정 밖에는 데모 진압대 버스와 전경들이 벽을 이루고 있었다. 최루탄 가스와 깨진 벽돌이 난무한 곳에서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 만무했다. 그래도 삶은 지속되고 일상은 전개되었다.

 리영희의 글과 오윤의 판화가 표지로 실린 박노해의 시집, 김중배와 최일남의 칼럼 등을 즐겨 읽던 어느 날 들국화의 1집 앨범을 만났다. <그것만이 내 세상>이 타이틀 곡으로 실린 이 앨범을 구입해 한정 없이 들었던 때가 바로 1985년이었다.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대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늘 들국화의 그 노래들이 가슴에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해바라기와 한영애의 노래도 함께 즐겨 들었다. 한영애와는 이후 방송에서 만나 친해졌었다.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무엇이든 배우는 것을 참 좋아하신 분이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시장주의와 경쟁지상주의 정책이 주창되더니 갑자기 한국교육방송은 당시 한영애가 진행하던 ‘한영애의 문화 한 페이지’라는 프로그램을 돌연 폐지하고 대신 그 시간을 영어·취업 프로그램으로 대체했기에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그녀의 앨범 중에서 우리나라 가요 14곡을 골라 리메이크한 <Behind Time 1925-55 A Memory Left At An Alley>(2003)를 가장 좋아한다. 그런데 실은 내가 가장 즐겨 듣는 노래는 그 앞에 발표한 <난다 난다 난·다>(1999) 앨범에 실린 <봄날이 간다>다. 전쟁의 폐허로 암울했던 1953년 발표한 백설희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것인데 가히 압권이다. 무엇보다도 노랫말이 너무 아름답고 아리고 슬픈데다 이를 해석하는 한영애의 음색이 절묘하다. 노래 중에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는 가사를 들으면 이유를 알 수 없게 가슴이 까맣게 물들며 먹먹해지는 것 같다.


말방울, 청동, 지름 17.5cm


청노새란 털빛이 푸른 노새(나귀)를 일컫는 말로 푸른빛이 돌 정도로 젊은 노새란 뜻이다. 짤랑대는 것은 분명 말의 목에 매단 방울에서 나는 소리일 것이다. 청노새에게 달아주는 방울은 노새가 가는 길에 마주칠지 모를 사나운 짐승을 물리치고자 하는 의미에서이다.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면 청노새 방울 소리를 환청처럼 떠올려본다. 사실 도시에서 자란 내가 저러한 노새의 방울 소리에 대한 추억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래도 가사 속의 방울 소리는 청각을 자극해 매혹적이고 절절한 떨림을 상상하게 한다.

 어느 날 골동 가게에서 우연히 청동으로 만든, 둥글고 단호하고 매끈하게 빠진 말방울 하나를 발견했다. 지름이 17.5cm니까 호두보다는 조금 큰 크기였는데 둥글고 단단했다. 한눈에 쏙 들어오는 완벽한 형태감을 지녔다. 매끄러운 표면은 단순하면서도 견고한 질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름대로 기품이 있고 완성도가 무척 높은 종이었다. 비록 짐승의 목에 거는 흔한 종일지언정 결코 허투루 만들지 않았다. 나는 이 작은 말방울을 손안에 넣고 만지작거리면서 흔들어 보기를 반복했다. 빈 곳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가 짜랑짜랑했다. 어느 한때 노새의 목에 걸려 짤랑거렸을 방울과 그 소리에 흠칫하며 물러났을 짐승들의 자리를 헤아려 보는 것이다. 본래 방울 소리는 초신 행위에 쓰였다. 방울은 무당이 신을 청할 때 손에 들고 흔들어 소리를 내는 강신의 용구, 이른바 무구다. 혼령들은 쇳소리를 싫어한단다. 쨍그랑거리는 이 쇳소리가 귀신들에게 혐오감을 준다고 믿었다. 그래서 방울, 종소리, 징 등 타악기 소리는 귀신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들이며 신명을 동화시켜 인도하는 소리에 해당한다. 그러니 무교에서 방울 소리를 내는 것은 신선을 모시고 사귀를 물리치는 방어적 주술행위에 해당한다. 이처럼 방울 소리는 신의 음성이기도했고 신을 즐겁게 하는 소리이자 신을 맞이하는 동시에 악신을 물리치는 도구였던 것이다. 이 말방울 또한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노새를 보호함과 동시에 모든 악귀, 악령을 물리치고자 하는 주술적 의미를 담고 있다.

 가끔 나는 한영애의 <봄날은 간다>를 들으면서 청노새의 방울 소리를 떠올리고, 그러면 잠시 이 작은 청동 말방울을 소리 내어 흔들어보곤 한다. 내 몸과 의식에 깃드는 그 모든 사악한 기운을 가능한 물리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 작은 방울 하나에 의지해 험한 산길을 고독하게 걸어가던 노새의 운명 또한 곰곰이 되새겨 보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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