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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매혹적인 거멍쇠 가위

박영택

가위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두 개의 날을 맞닿도록 하여 옷감이나 종이, 머리털 따위를 자르거나 오리는데 쓰는 기구.” 하나 마나 한 소리가 사전에 적힌 개념어다. 그 차갑고 건조한 개념어를 대신해서 나를 구원해 주는 것은 실제 내 눈에 놓인, 내가 보고 만질 수 있는 실물로서의 가위들이다. 내 책상 주변에도 몇 개의 가위가 있다. 공부하거나 글을 쓰는 일은 우선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일로부터 출발한다. 주변에서 접하는 모든 인쇄된 것들에는 다양한 정보가 담겨 있다. 이런저런 인쇄물들을 살피다가 중요한 부분이 나타나면 공들여 밑줄을 긋는다. 그런 후에 가위로 오려낸다. 따라서 가위가 필요할 때에는 내가 무엇인가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이고 그것을 가능한 오랫동안 기억해 망실하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하는 시간이다. 그때 비로소 가위가 나와 동반한다. 나는 핀란드제인 작은 가위(FISCARS)를 들고 오랫동안 그 일을 하고 있다. 가위를 손가락에 끼고 얇은 종이를 잘라나가는 일은 그렇게 해서 얻은 소중한 자료를 온전히 보존하고 소중하게 보듬어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약속이 실행되는 일이기도 하다.

어느 한순간 저 자료를 읽고 줄을 치고 그리고는 조심스레 가위로 절취해서 지금까지 보존하고 수시로 꺼내보던 순간을 추억하고 그때 읽었던 문구들을 다시 조용히 떠올려보는 일은 더없이 소중하다. 나는 세상에 떠도는 소중한 말들, 언어들, 생각들을 하나라도 건져 올려 내 육체 가까이에 두고, 그것들이 얇은 종이의 표면에 서식하고 있는 생의 조건을 가능한 지속해 쉽게 사라지거나 의미 없는 것으로 지워지지 않기를 바란다.

거멍쇠 가위


인사동에 나가면 가능한 들리는 장생호에 가서 물건들을 보다가 문득 원형의 테이블 한가운데에 가득 담긴 여성용 기물에 눈을 주는 순간 매혹적인 가위 하나를 발견했다. 15cm 길이의 철로 만든 가위로서 침선용 도구인데 연대는 한 백 년 정도 된 것이란다. 두 날과 손잡이가 연결되는 부위에 ‘正次(정차)’라는 한자어가 살짝 음각되어 있다. 짙고 어두운 철의 색감이 깊은 무게감을 주고 매끈하고 날렵하게 빠진 손잡이 선이 주는 곡선의 미가 대단했다. 마치 유기체의 몸통을 접하는 느낌도 들고 좌우대칭으로 부드럽게 휘어진 선이 안기는 드로잉 맛이 절묘했다. 자연계에서 발견되는 철은 산화철의 형태를 띠며 검은빛이라 선인들은 철을 ‘거멍쇠’(검은 쇠)라고 불렀다. 철은 상온에서도 산화됨으로 이를 막기 위해 예전에는 기름이나 옻칠을 해 쇠의 표면을 검게 만들었기에 또한 거멍쇠라 불렸다. 전통적으로 철의 가공술은 성형방법에 따라 크게 부리질(鑄造)과 두드리질(鍛造)로 나뉜다. 빨갛게 달굼질된 덩이쇠를 두드려서 각양의 형태로 만들어가는 제작 과정을 통해 대장장이들은 특유의 불과 망치로 놀라운 기예의 미를 보여 주었다. 이 가위 역시 그런 제작과정을 통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조선 후기의 작품으로 추측되는 작자·연대 미상의 한글 수필로 <규중칠우쟁론기>가 있다. 교과서에도 실린 글이다. 이 글은 규중 부인들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침선의 7가지를 의인화하여 인간사회를 풍자한 것인데 그 칠우(七友)는 세요각시(바늘)·척부인(자)·교두각시(가위)·울낭자(다리미)·청홍흑백각시(실)·인화낭자(인두)·감투할미(골무)를 일컫는다. “이른바 규중칠우는 부인내 방 가운데 일곱 벗이니 글 하는 선비는 필묵과 조희 벼루로 문방사우를 삼았나니 규중 녀잰들 홀로 어찌 벗이 없으리오”로 시작하는 <규중칠우쟁론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바느질도구는 힘겨운 노동의 도구였을 뿐만 아니라 의인화된 친구였다. 부인네들의 침선 도구는 반짇고리에 담겼다. 보통 나무 상자로 만들고 나무에 문양이 있는 종이를 바르고 기름을 먹였다. 상자 안쪽에는 수(壽), 복(福), 부(富), 귀(貴), 다남(多男)을 써넣었다. 팔각 반짇고리로 있다. 안쪽에 작은 5각형 함이 붙어 있는 것도 보았는데 깜찍했다. 아마도 작은 물건을 넣어두는 공간인데 바느질하다가 잃어버리기 쉬운 도구들이 그 안에 들어있을 거다. 참 지혜로운 발상이다. 반짇고리 안에는 대표적으로 가위와 실패 등이 들어 있다. 그 밖에 나무 자, 자개자, 대자 등도 있는데 무엇보다도 화각자는 색상과 문양에서 무척 아름답다. 매화와 민초가 음각되어 있거나 학, 사슴, 거북, 구름, 돌, 불로초 등의 십장생이 조각된 것들도 자주 보았다. 나는 단순하게 직선만이 새겨진 나무 자를 하나갖고 있는데 더없이 무심한 생김새와 짙은 색감이 마음에 들어 사들였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바느질 솜씨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이 침선구들은 늘 여인들 곁을 지켜주었던 바느질 노동의 친구이자 유희와 예술의 도구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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