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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순수하고 단호한 직선의 맛

박영택

줄무늬 떡살


삼국시대 토기 잔 하나를 우연히 소유하게 되면서부터 시작된 골동 수집(수집이라고 말하기는 겸연쩍지만)은 이후 다양한 품목으로 조금씩 확장되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좋은 게 너무 많고 마음에 드는 수많은 것들이 마구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돈이 없으니 비교적 저렴한 것 중에서 조형적인 미감을 한껏 두르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사긴 하는데 아직은 골동을 보는 안목이 많이 부족하고 경험도 미천하다 보니 허접한 것들에도 쉽게 마음이 가고 갈팡질팡하면서 물건을 고르는 형편이다. 몇 해 전 대구 계명대학교에 특강이 있어 내려갔다가 오는 길에 시간을 내서 미군부대 후문에 있는 대구골동상가에 들렸다. 우연히 그곳에 위치한 대동이란 가게에 들러 물건을 구경하다가 작은 떡살 하나를 발견했다. 줄무늬만이 단호하고 선명하게 새겨진 작은 떡살이었다. 모든 수식, 장식을 최대한 절제한 체 오로지 직선만이 그어져 있었다. 일정한 높이로 올라온 손잡이 부분과 직사각형의 꼴, 군더더기 없이 상큼한 눈 맛을 주는 비례감, 진한 색감, 수수한 기하학적인 선 등이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빗(빛)살무늬토기의 표면에 그어진 그 선, 태양 빛을 연상시키는 눈부신 선, 밭고랑의 선,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관념이 빚은 바로 그 직선이었다. 대단히 세련되고 현대적인 감각을 물씬 풍기는 선, 조형미가 아닐 수 없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섬세하게 그어나간 아그네스 마틴의 라인 작업이나 박서보의 후기 묘법작업이란 것이 바로 이 떡살 무늬를 흉내 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주인이 권하는 다른 떡살은 눈에 차지 않았고 오로지 그 떡살 하나만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해서 구입한 그 떡살이 내가 소유한 최초의 떡살이었다. 이후 몇 개의 떡살을 더 구입하긴 했는데 앞서 구한 그 떡살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그러다가 평창동에 자리한 평창아트에서 정말 우연히, 기적처럼 바로 그 직선만이 단호하게 그어진, 날이 선 것처럼 직선이 단호하게 올라선 다양한 모양의 떡살을 여러 점 만나게 되었다. 무심하고 소박하게 깎은 떡살은 수평의 선만을 단호하게 보여주었다. 더없이 매력적인 그 선은 내 눈을 사로잡았고 해서 마음은 마냥 들떠있었는데 사장님은 그 떡살을 흔쾌히 내게 건네주었다. 살다 보면 기적 같은 일도 벌어지는 것이다. 이후 인사동에 있는 고려방에서 꽤나 길고 커다란 직선무늬의 떡살 하나를 다시 구입하게 되어 이제 선 무늬, 통상 국수무늬라고 부르는 떡살을 10여 점이 넘게 소장하게 되었다. 앞으로 이 무늬 떡살만을 조금씩 모아볼 요량이다. 떡살은 떡의 표면에 무늬를 찍는 일종의 도장과 같은 용구로 떡본, 떡손, 병형(餠型)이라고도 한다. 아마도 떡살은 농경의 시작과 함께 떡을 해 먹었기에 등장한 것이리라. 명절이자 제사 등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야 만들어 먹은 떡이기에 맛도 좋아야 하지만 보기도 좋아야 했고 그래서 기복의 의미를 지닌 온갖 무늬로 장식을 더했으리라. 일정한 모양으로 예쁘게 떡을 만들고 가장 인간적인 소망을 그 떡의 표면에 깊숙이 눌러 박은 게 떡살이었다. 그런 떡을 먹으면 떡의 피부에 시술한 무늬, 의미도 함께 먹는 꼴이니 이는 떡만이 아니라 보기 좋은 문양도 먹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무병장수하라는 의미 역시 목구멍으로 삼키는 일이다. 우리 선조들은 이처럼 먹고 나면 없어져 버리는 떡 하나에도 갖은 마음을 다하고 온 정성을 다하여 보기 좋게 만들었다. 먹은 떡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몸속으로 스며들어 생명을 가능하게 하고 삼킨 무늬는 확고한 믿음과 신앙으로 자신을 지켜주었을 것이다. 지금 그 마음과 정성은 죄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떡살은 주로 나무로 만들어 썼다. 도자기로 만든 것도 있고 곱돌로 제작된 것도 있으나 역시 떡살은 나무가 제격이다. 당연히 질기고 단단한 목재를 잘 말려서 무늬를 조각했는데 이는 오래 사용해도 그 무늬가 닳거나 손상되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떡에 찍히는 문양의 날이 항상 날카롭게 서 있어야 했으리라. 나는 저 긴장되어 날 선 선의 모서리를, 경계를 동경의 눈으로 바라본다. 매번 찍히고 찍혀도 결코 닳거나 문드러지진 않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또한 나무떡살은 사람들이 하나하나 정성껏 조각했기에 비슷해 보이면서도 동일한 것은 결코 없고 또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보는 재미가 있고 묘미가 있다. 선 무늬는 장수와 해로(偕老)를 상징하고 빛을 상징하는데 사실 이 기하무늬는 가장 단순한 무늬이자 원초적인 장식일 것이다. 가장 매혹적인 아름다움은 이처럼 정직하고 순수하면서도 단호한 맛이 있어야 한다. 삶 또한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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