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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막강 수완의 사업가 아브라모비치, 세련된 모델 만나 ‘예술팬’ 되다

이영란

러시아는 중세 및 근대미술은 강해도 현대미술은 오랫동안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런 러시아에 본격적인 현대미술 시대가 열리고 있다. 자원개발로 거대한 부(富)를 축적한 러시아의 억만장자 로만 아브라모비치(Roman ABRAMOVICH, 1966- ) 밀하우스 LLC. 회장과 그의 파트너 다샤 주코바(Dasha ZHUKOVA, 1981- )가 모스크바 예술계를 일거에 바꿔놓은 주역이다. 이 커플은 지난 2008년 프란시스 베이컨의 <트립틱>(1976년 작, 8,630만 달러) 등 유명한 작품을 잇달아 사들이며 글로벌 미술계에 큰 화제를 뿌렸다. 같은 해 모스크바의 유서 깊은 근대건축물인 옛 버스 차고를 ‘당대 문화를 위한 차고센터’(The Garage Center for Contemporary Culture)로 꾸미고 수보드 굽타, 윌리엄 켄트리지, 마이클 고든 같은 쟁쟁한 작가들의 기념비적인 전시를 개최했다. 세계 미술계 유력인사들이 이를 보기 위해 러시아로 날아갔다.


로만 아브라모비치와 다샤 주코바


2015년에는 모스크바 남쪽의 고리키공원에 더개러지현대미술관(The Garage Museum of Contemporary Art)을 개관하고 맹렬하게 기획전을 열고 있다. 해마다 7, 8건의 굵직굵직한 전시와 이벤트를 선보이며, 새 바람을 일으키는 중이다. 5,400㎡에 달하는 전시관(총 5개)과 영화관 등을 갖춘 개러지현대미술관은 ‘모스크바에 가면 꼭 둘러봐야 할 문화명소’로 급부상했다.

다른 나라 패트론이 30-40년은 걸려야 할 일을 아브라모비치 커플은 불과 10년 만에 밀어붙였다. 대단한 속도가 아닐 수 없다. 초스피드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매머드 문화예술사업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모비치의 엄청난 재력(자산 103억 달러, 포브스)과 타고난 추진력 때문이다. 또한 야심만만하고 영리한 다샤 주코바의 활약도 간과해선 안 될 대목이다.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리투아니아계 러시아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사업가였고, 부친은 공무원이었다. 조실부모해 삼촌 손에 키워졌던 그는 어렸을 때부터 계산이 빨랐고, 정치적 감각도 있었다. 군복무시절에도 개인 장사를 했을 정도다. 모스크바에서 고무로 된 장난감 오리를 팔던 아브라모비치는 1987년 올가와 결혼한 후 인형 제조회사를 만들었고, 재생 타이어 판매도 시작했다.

모스크바대 법학과를 졸업할 무렵 러시아에 페레스트로이카(개혁) 바람이 불자 그는 이에 재빨리 올라탔다. 소련 당국의 개인 상업활동 허용 정책에 힘입어 스위스와의 무역 등 각종 사업을 전개했다. 자원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1992년에는 석유 및 석유제품의 생산과 유통을 수행할 회사를 설립했다. 옐친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재계거물 보리스 베레조프스키(1946-2013년 런던서 의문사)의 눈에 들며 1995년 국영 정유회사인 시브네프트를 함께 인수하기도 했다. 때마침 국제유가가 폭등하면서 돈방석에 앉았다. 나이 서른에 올리가르히’(Oligarch: 러시아 신흥재벌)가 된 것. 옐친과 가까웠던 그는 푸틴 대통령과도 부자지간처럼 관계가 돈독해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크렘린의 일원’으로 불리며 시베리아의 석유와 천연가스 개발권을 보유한 러시아 제1의 석유회사 유코스까지 합병하며 최고의 억만장자가 됐다. 그는 푸틴의 종용으로 축치 자치구 주지사가 돼 2억 달러를 밀어넣었고, 각계에 막대한 기부금을 쾌척했다.

서방세계에 그가 이름을 알린 것은 2003년 영국 축구 프리미어리그의 첼시 구단을 인수하면서다. 첼시FC의 구단주가 된 후 아브라모비치는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스타 선수와 감독을 잇달아 영입하여 첼시는 명가로 등극했다. 아브라모비치는 결혼 이력 또한 화려하다. 스물 한 살에 첫 결혼을 한 이래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모두 이혼했다. 스튜어디스 출신의 두번째 부인 이리나와는 17년을 함께 했는데 아브라모비치가 15살 연하의 모델 다샤 주코바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파경을 맞았다. 2008년 비밀예식을 올리고 억만장자의 세번째 부인이 된 주코바는 사업과 축구밖에 모르는 남편을 현대미술의 세계로 이끌었다. ‘식견 없는 졸부’라는 이미지를 씻으려면 예술과 가까워져야 한다고 판단한 것.


루시안 프로이트, 잠자는 베네피츠 슈퍼바이저, 1995, 151×219㎝


부부는 세계 미술시장을 쥐락펴락하는 미국의 아트딜러 래리 가고시안을 개인 교사 삼아 아트컬렉션을 시작했다. 런던과 뉴욕의 미술 경매를 누비며 루시안 프로이트의 1995년작 <잠자는 베네피츠 슈퍼바이저>(3,360만 달러) 등 일반인은 쉽게 사기 어려운 작품들을 사들였다. 프로이트의 누드화를 살 당시 아브라모비치는 비만의 나부(裸婦)를 화면이 꽉 차도록 신랄하게 그려 넣은 것에 난색을 표했다는 후문이다. ‘러시아 현대미술의 기수’로 추앙받는 일리야 카바코프의 대표작도 사들였다. 미국인 컬렉터 존 스튜어트가 보유해온 카바코프 컬렉션(회화 39, 설치미술 19, 드로잉 100여 점)을 6,000만 달러(652억 원)에 넘겨받았다. 아울러 러시아 근현대미술의 발자취를 보여주는 각종 자료와 사진을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일리야 카바코프, 날개-당신을 보다 천사처럼 보이게 하는 방법, 1999


이 같은 작업을 주도한 것은 주코바다. 석유 및 니켈광산 사업과 투자회사, 첼시 구단 운영으로 바쁜 남편을 대신해 예술 부문을 총괄했다. 주코바는 러시아인이긴 하나 미국서 성장해 반(半)미국인이다. 요즘은 런던과 모스크바를 오가며 활동하니 그야말로 코스모폴리탄이다. 남편과는 같은 유대계여서 쉽게 가까워졌는데, 사실 주코바는 꽤나 고상한 가문 출신이다. 아버지는 러시아 부총리였고, 어머니는 분자생물학 전문가로 UCLA 교수였다. 부모는 딸이 세살 때 헤어졌다. 주코바는 모친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해 캘리포니아대(산타바바라 캠퍼스)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미국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패션브랜드(Kova+T)를 론칭하고, 모델로도 활약했던 주코바는 아브라모비치와 만나면서 본거지를 런던으로 옮겼다. 패션잡지 『Pop』의 편집장을 맡았던 그는 2008년 모스크바시 북쪽에 ‘당대 문화를 위한 차고센터’를 만들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개관식에는 전 세계 미술계의 파워인물이 대거 참가했다. 운동장처럼 넓은 공간(8,547㎡) 때문에 버스 차고로 사용됐던 건물은 러시아 구성주의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줘 근대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주코바는 “예전부터 모스크바에 이런 공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된 교육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아카이브 구축에도 힘쓸 것”이라고 밝혔다.

2014년에는 기관의 명칭을 개러지현대미술관으로 바꾸었고, 이듬해에는 고리키공원에 신축건물로 이전했다. 옛 식당을 건축가 렘 콜하스가 새롭게 디자인했는데 현대미술 기획전과 연구는 물론, 예술아카데미와 아카이브 전시를 활발히 시행하고 있다. 쿠사마 야요이, 우르스 피셔, 우고 론디노네를 거쳐 현재는 무라카미 다카시 작품전이 한창이다. 주코바는 현대미술 매거진 『GARAGE』도 창간해 제프 쿤스, 데미안 허스트, 존 발데사리 같은 유명 아티스트와 특별대담을 이어가고 있다. 또 LACMA와 메트로폴리탄뮤지엄 이사로 활동 중이고, 뉴욕 허드슨 야드에 설립될 신개념 예술센터 ‘Culture Shed’의 창립멤버이기도 하다. 이에 그를 억만장자의 ‘트로피 애인’쯤으로 여겼던 이들도 생각을 바꿨다고 한다. 주코바는 트럼프 대통령의 딸 이방카와 오랜 절친으로, 남편을 통해 ‘트럼프와 푸틴을 연결했다’는 후문도 들린다.

이렇게 10년을 함께 했던 두 사람은 지난해 8월 갑자기 결별을 선언했다. 두 사람이 갈라지게 된 결정적 이유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뉴홀랜드 아일랜드를 예술섬으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의견충돌이 반복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부는 러시아 표트르 대제가 18세기에 조성한 뉴홀랜드 섬(약 1만 평)에 문화시설과 상업 및 주거용 건물을 짓는 사업을 막 시작한 상태다.

커플은 이혼을 발표하며 “개러지현대미술관과 뉴홀랜드 프로젝트는 차질없이 이어갈 것”이라고 천명했다. 문제는 아브라모비치가 과연 ‘사업과 축구’처럼 ‘현대예술’을 지속적으로 사랑하고, 후원할지 여부다. 그의 지원 없이는 강단 있는 주코바도 일련의 사업을 계속할 수 없다. 연간 1,000억-1,500억 원의 예산을 필요로 하는 개러지현대미술관과 조(兆) 단위 프로젝트인 뉴홀랜드 예술섬의 향배는 그래서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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