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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딱정벌레 15만 점 모았던 ‘수집광’ 록펠러 3세, 최고의 컬렉션 기부하고 영면에 들다

이영란

록펠러는 미국 경제를 150년 넘게 지배해온 명문가로 미국의 근현대사를 논할 때 이 가문을 빼곤 이야기가 안 된다. 영국의 논리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현대를 만든 사람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록펠러와 비스마르크다. 한 사람은 경제에서, 한 사람은 정치에서 각각 ‘독점체제’와 ‘관료제 국가’를 만들었다”고 진단했다. 록펠러 그룹의 창업자인 ‘석유왕’ 존 데이비슨 록펠러(1839-1937)는 19세기 말 고속성장하던 미국경제의 흐름을 타고 단숨에 백만장자가 됐다. 그가 만든 스탠더드오일은 미국 내 석유 생산·가공·판매의 95%를 독점했다. 유대인인 록펠러는 근면과 절약이 몸에 밴 사람이었고 돈을 벌기 위해선 리베이트와 뇌물 공여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추악한 재벌’이란 오명이 따라다녔다. 이에 외아들이었던 록펠러 2세는 사회공헌에 매진했다. 문화유적 복원, 국립공원 조성 등에 거액을 대며 가문을 ‘왕조’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3대에 이르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가문의 법통을 이어받은 차남 넬슨 록펠러는 대통령을 꿈꿨으나 가문의 비리만 노출했다. 결국 3대 중 막내였던 데이비드 록펠러(1915-2017)가 실력자로 올라섰다. 하버드대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엄정한 리더십으로 체이스맨해튼은행을 미국을 대표하는 상업은행으로 키웠다. 형들이 차례로 세상을 뜬 후 자산 전반을 관리한 그가 지난해 3월 102세로 숨지자 언론들은 “록펠러의 마지막 파워맨이 타계했다”고 전했다. 구심점을 잃은 록펠러가는 현재 4-7대 후손들이 제각각 움직이고 있다.

록펠러 3세인 데이비드 록펠러(이하 D.록펠러)는 집요한 사람이다. 6남매 중 유난히 영특했던 그는 무엇이든 수집하는 걸 좋아했다. 열 살 때 딱정벌레에 매료돼 평생 15만 점이나 모았다. 조부와 부친이 대대로 사용하던 가구와 집기도 버리는 법이 없었다. 한창때 D.록펠러는 하루 18시간씩 일했다. 비서들이 “화장실에 갈 틈도 주지 않는다”며 볼멘소리를 했을 정도다. 매사 합리를 중시하고, 한치 빈틈없이 움직였지만 죽어라 일만한 건 아니다. 집무실을 나서는 순간 전혀 다른 인간이 되곤 했다. 사업에 있어선 냉혈한이었지만 예술, 특히 미술을 사랑했다. 어린시절부터 어머니 손을 잡고 뮤지엄을 자주 드나든 탓이다.

D.록펠러의 모친 애비 록펠러는 열성적인 패트론이었는데 컬렉터인 두 명의 친구와 함께 미술관 설립을 추진했다. 1920년 무렵 뉴욕은 현대미술이 막 꽃을 피우고 있어 당대 미술을 수용할 미술관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아내의 계획에 반대했던 록펠러 2세는 나중에는 맨해튼의 금싸라기 땅을 내주고, 자금도 지원했다. 마침내 1929년 MoMA는 문을 열었다. 하지만 록펠러가는 작품, 부지, 돈을 모두 댔음에도 미술관에 ‘록펠러’라는 이름을 달지 않았다. 고유명사 없이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이라 한 덕분에 특정 가문에 종속되지 않고 한껏 그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이런 모친에 이어 D.록펠러는 MoMA 후원에 팔을 걷어붙여, 수백여 점의 미술품을 기증했고 이사회 의장을 역임하며 후원금을 쾌척했다. 오늘날 뉴욕이 세계 현대미술의 중심지가 된 데는 이들 모자(母子) 같은 패트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년에 D.록펠러는 뉴욕 MoMA에 1억 달러를 더 기부하는 등 평생에 걸쳐 9억 달러를 각처에 기부했다. 지난 2015년, 자신의 100세 생일에는 메인주(州) 국립공원 옆 부지 120만 평도 내놓았다. 자녀들을 키울 때 돈 씀씀이를 엄격히 통제했던 사람이지만 자선사업에는 ‘통 큰’ 면모를 보였다. 작품 수집에서도 좋은 그림과 조각이 나오면 아낌없이 돈을 쓴 그의 컬렉션은 해당 작가의 최고작이 즐비하다.

페기 & 데이비드 록펠러 부부


그는 아내 페기 록펠러와 그림을 감상하러 다니는 것을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꼽았다. 정원 가꾸기가 취미였던 페기 여사도 남편 못지않게 미술을 좋아했다. 두 사람은 50년간 함께 컬렉션에 임했다. 부부의 컬렉션 원칙은 “의견이 일치할 때 구입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초기에 산 작품 중에는 모네의 <수련>이 돋보인다. 알프레드 바 MoMA 관장의 추천으로 1956년 카티아 그란프란 딜러를 만나 이 그림을 구입했다. “늦은 오후 연못의 물빛과 수련이 환상적이어서 곧바로 결정했다”고 D.록펠러는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모네의 대작을 자택에 걸고 음미하던 부부는 이후 모네의 풍경화를 연속적으로 사들였다.

마크 로스코, 화이트센터, 데이비드 록펠러가 소장했다가 2007년 경매 통해 판매


1960년에는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의 <화이트 센터> 를 8,500달러에 샀다. 당시 뉴욕의 존경받는 화상이었던 시드니 제니스는 이 매혹적인 그림을 마지못해 팔았다. 로스코의 걸작을 손에 넣은 D.록펠러는 장장 47년간 감상해오다 2007년, 소더비 경매에 내놓았다. 구순을 넘긴 기념으로, 또 먼저 간 아내를 추모하며 그림을 기부했다. 작품은 ‘록펠러 보유작’이란 점 때문에 화제를 모았고, 당시환율 기준 675억 원 상당인 7,284만 달러에 팔렸다. 전후(戰後) 현대미술 최고가도 가뿐히 경신했다. 『뉴욕타임스』는 “록펠러라는 이름이 기적을 만들었다. 낙찰자는 작품과 함께 ‘록펠러’라는 이름도 샀다”고 보도했다. 구매자는 카타르 왕실로 밝혀졌다.

조르주 쇠라, La rade de Grandcamp, 1885


록펠러 부부가 가장 극적으로 수집한 작품은 피카소의 <꽃바구니를 든 어린 소녀>이다. 피카소가 1905년 로즈 시기에 그린 몇 안되는 희귀작을 수집하게 된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미국 출신의 소설가이자 비평가로, 파리에서 예술가들을 후원하던 거트루드 스타인은 피카소와의 인연으로 누드화를 매입했다. 스타인이 죽자 그림은 연인이 한동안 보유했고, 1968년 매물로 나왔다. D.록펠러 부부는 스타인 컬렉션을 건네받기 위해 수집가그룹을 결성했다. 회원들은 펠트 모자 속 번호가 적힌 종이를 하나씩 집어 들었는데 마침 페기가 피카소를 뽑은 것이다. 두 사람은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그림을 가져와 가장 중요한 위치에 걸고, 오래오래 음미했다. 이후 부부는 마네, 고갱, 마티스, 그리스, 쇠라, 시냑 등 후기인상파, 입체파, 점묘파 작가들의 회화, 조지아 오키프, 에드워드 호퍼 같은 현대작가들의 작품도 수집했다. 그중 마티스의 < 오달리스크>는 패브릭의 패턴과 꽃, 과일이 인물과 대담하게 어우러진 작품으로 마티스의 자유분방한 회화세계를 보여주는 수작이다.
부부는 아시아 미술에도 관심이 지대했다. 중국 고미술 중에는 청나라 강희제 시대 <아미타 황금불상>과 15세기 <용문청화백자>가 도드라진다. 페기 여사는 저택 한 쪽에 불상과 아시아 고미술로 ‘부다 룸’을 꾸미기도 했다. 체이스맨해튼 총재 자격으로 1974년 한국을 처음 찾은 D.록펠러는 이후 서울에 올 때마다 인사동 골동가를 순례했다. 특히 통인가게는 해마다 두 차례씩 찾았다. 김완규 통인가게 주인은 “청와대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길에 우리 가게부터 들렸는데 조선 목기와 민화를 무척 좋아했으며, 대부호인데도 의외로 소탈했고 값을 깎아달라고 해 애를 좀 먹었다”고 회고했다.
록펠러가는 장수(長壽)로도 유명하다. 록펠러 1세는 98세까지, 록펠러 3세는 102세까지 살았다. 3세인 D.록펠러는 장수비결을 묻는 이들에게 “사람들은 내게 늘 같은 질문을 하고, 나는 늘 같은 대답을 한다. 좋은 친구와 시간을 보내고, 아이들과 놀고, 당신이 가진 걸 즐기라”고 했다. 또 “남과 공유할 수 없는 소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세상을 뜨기 전 자신의 컬렉션과 가문의 가보를 경매를 통해 팔아 수익금을 모두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크리스티 경매는 록펠러 컬렉션 중 2,000점을 추려 오는 봄 경매를 펼친다. 골갱이에 해당되는 인상파 및 모더니즘 미술에서부터 현대미술까지 다양한 시기 작품이 출품된다. 미국 및 아시아미술, 앤틱가구, 도자기도 곁들여진다. 이학준 크리스티 코리아 대표는 작년 11월 홍콩에서 D.록펠러 컬렉션 40점이 소개됐는데 2만 명이 관람했으며 작품 수준도 뛰어나고 록펠러 소장품이란 프리미엄까지 붙게 돼 틀림없이 ‘세기의 경매’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어린 시절부터 아름다운 예술에 둘러싸여 자랐고, 다채로운 미술품을 수집했던 부호는 이렇게 특별한 선물을 남기고 떠났다. 그의 방대한 컬렉션은 이제 각국으로 흩어져 또 다른 곳에 둥지를 틀 것이다. 아트컬렉션의 의미와 가치, 연속성을 곱씹어보게 하는 흔치 않은 사례라 그 결과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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