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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미술과 담쌓고 자랐던 GUESS 마르시아노 형제, LA에 예술가를 위한 전진기지를 만들다

이영란

 
좌) 모리스 마르시아노, 폴 마르시아노 형제               
우) 폴 매카시, White Snow Head, 2012-13, MAF 컬렉션

요즘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는 미술관 건립이 줄을 잇고 있다. 부동산재벌 일라이 브로드가 2015년 ‘더 브로드(The Broad)’를 개관해 연 100만 명씩 관객을 모으고 있고, 작년에는 ‘메인뮤지엄’이 오픈했다. 다국적 화랑 하우저&워스의 6번째 분점 ‘하우저워스&쉬멜’도 미술관급 전시로 개관을 알렸다. 

근사한 미술 공간이 속속 생겨나는 상황에서 청바지 브랜드 GUESS가 지난 5월 LA의 미스테리한 사원 스코티시라이트메이스닉템플에 미술관을 오픈했다. ‘마르시아노 아트 파운데이션’(약칭 MAF)이란 타이틀로 문을 연 이 미술관은 GUESS를 공동창업한 모리스 마르시아노, 폴 마르시아노(Maurice & Paul MARCIANO) 형제, 특히 형인 모리스 마르시아노의 열정의 산물이다. LA 지역의 손꼽히는 컬렉터인 그는 작가들 사이에 “예술후원자가 가야 할 길을 제대로 알고 있는 패트론”으로 정평이 나 있다.

마르시아노 형제의 어린 시절은 예술과 거리가 멀었다. 대대로 랍비(성직자)를 역임했던 유대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들은 알제리를 거쳐 마르세유에서 성장했다. 부모는 신실하고 엄격했지만 자식들은 의외로 자유분방했다. 패션에 재능이 있던 큰아들 조지가 MGA라는 부티크를 창업하자 동생들도 뛰어들었다. 이들이 만든 유니섹스 진은 대박을 터뜨렸고, 형제는 1979년 LA로 이주해 패션사업을 본격화했다. 1981년 ‘섹시함’을 강조한 스톤워시 진 GUESS가 탄생하자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론칭 첫해에 600만 달러라는 엄청난 매출을 올렸다. 

집안의 네 형제가 모두 뛰어든 데님사업에서 모리스는 경영과 회계부문을 챙겼는데, 아트컬렉션에도 시동을 걸었다. 그는 GUESS의 CEO로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늘 화랑과 미술관을 찾았다. 10대 시절 파리 수학여행 길에서 접한 오르세미술관의 인상파 그림들이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모리스는 파리에 출장 갈 때마다 동생 폴을 대동하고 갤러리를 찾았다. 후기인상파 화가 귀스타브 로아조의 풍경화 등을 사들였다. 모리스는 “우린 그때 향수에 빠져 있었다”고 회고했다. 두 사람은 “15만 달러 이하의 그림만 산다”는 원칙을 세워놓았다. 그게 상한선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만족할 순 없었다. 벌이가 좋으면 멋진 그림들이 자꾸 다가오게 마련이다. 결국, 1988년 11월, 선을 훌쩍 넘고 말았다. 모리스는 뉴욕 소더비 메이저 세일에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Sailboats III>(1974년 작)를 낙찰받았다. 60만 달러에서 시작한 경매는 열띤 경합 끝에 무려 130만 달러(수수료 포함)로 치솟았다. 그래도 근사한 작품을 손에 넣은 뿌듯함은 형언키 어려웠다. 형제는 그 뒤로 이브 클라인, 윌렘 데 쿠닝, 앤디 워홀, 장 미셸 바스키아 같은 블루칩 작가들의 그림을 사들였다. 도널드 저드, 모리스 루이스, 샘 프란시스의 작품도 수집했다. 컬렉터라면 누구나 탐낼만한 최고 수준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1990년 미술품 값이 폭락하기 시작하면서 고가의 그림도 가격이 맥없이 추락했다. 해를 넘기며 상황을 지켜보던 형제는 감정사를 불러 수집품의 가격을 측정해봤다. 매입가의 절반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되자 실망한 그들은 컬렉션을 정리하기로 했다. 이브 클라인 등 몇 점만 남기고 대부분 팔았다. 낙담이 컸기에 결정을 서두른 것이다. 

하지만 이 판단이 패착이었다. 형제가 작품을 팔자마자 가격이 반등하기 시작했고, 1998년에는 완전히 만회됐다. 모리스는 “지금 생각하니 그것들을 그냥 포장해서, 창고에 넣어두었어야했다. 벽에 걸어놓고 자꾸 고민했던 게 문제다. 안타까운 결정이었다”고 토로했다. 바스키아, 드 쿠닝, 워홀을 정리한 건 특히 뼈아팠다. 리히텐슈타인의 <Sailboats III>가 2012년 경매에 다시 등장해 1,180만 달러에 팔렸다는 소식에 형제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을 것이다. 



크리스토퍼 울, And if you, 1992, MAF 컬렉션


그러다가 모리스는 2005년, 뉴욕 크리스티에서 리처드 디벤콘의 풍경화를 340만 달러에 사면서 미술계에 재진입했다. 아름다운 산타크루즈 해변을 담아낸 디벤콘의 그림은 그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이후 2007년, LA 현대미술관(MoCA)에서 열린 무라카미 다카시의 대규모 회고전에 매료된 모리스는 앞으로 기존 전시의 문법을 깨는, 흥미롭고 역동적인 프로그램이 확산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를 계기로 형제는 1990년대 이후 제작된 현대 작가들의 회화, 조각, 설치미술, 행위예술, 미디어아트, 영상을 집중적으로 사들였다. 컬렉션의 범위를 당대 미술로 한정하고, 매 작가의 의미심장한 작품을 수집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2012년 CEO를 동생 폴에게 넘기고 명예회장으로 물러앉은 모리스는 작품 수집을 진두지휘했다. 그 결과 200여 명의 작품 1,500점이 모였다. 

모리스는 2012년 MoCA 이사회에도 참여했다. 이사회 멤버가 된 후 스털링 루비의 조각 2점을 매입해 1점은 미술관에 기증하고, 1점은 GUESS 사옥에 설치했다. 현재는 MoCA 이사회 공동의장이다.

마르시아노 형제의 컬렉션은 세계 미술계 강자로 부상한 스타 작가에서부터 이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유망주까지 다채롭다. 게르하르트 리히터, 안토니 곰리, 아니쉬 카푸어, 올라퍼 엘리아슨, 매튜 바니, 신디 셔먼, 무라카미 다카시를 필두로, LA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에드 루샤, 폴 매카시, 작고작가 마이클 켈리가 포함됐다. 모리스는 미술가들의 스튜디오를 찾아 대화하고, 토론하길 즐겼다. 그들의 아이디어가 예술로 창조되는 과정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에드 루샤, 마크 그로찬과는 밤늦도록 난상토론도 펼쳤다. 

모국인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도 수집했다. 다니엘 뷔렌, 장미셸 오토니엘, 시프리앙 가이야르가 그들이다. 또 슈퍼리치들이 썩 내켜 하지 않는 설치미술과 개념미술, 영상작업도 수집했다. 크리스찬 마클레이, 우고 론디노네의 작품이 리스트에 올랐다. 한국작가 중 하종현, 이우환, 양혜규와 중국, 일본 작가 작품도 매입했다. 

작품이 쌓여가자 두 사람은 2013년에 재단을 만들고, 뮤지엄 건립에 나섰다. 단, 지금껏 조성된 미술관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미술관을 구상했다. 모리스는 “우리에게 ‘더 브로드’와 ‘MoCA’가 더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라며 “LA를 본거지로 활동하는 작가들을 위한 뮤지엄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컬렉션 전시와 함께, 각종 포럼과 이벤트, 공연이 어우러지게 하겠다는 복안도 세웠다. 

2013년, LA의 여러 부지를 돌아보던 모리스에게 알렉스 이스라엘이란 화가가 비밀조직인 프리메이슨이 1961년부터 수십 년간 집회를 가졌던 유서 깊은 사원을 추천했다. 이 기이하고 유별난 건물에 매료된 형제는 800만 달러를 지불하고 사들였다. 그리곤 2명의 영상작가를 기용해 프리메이슨들이 남긴 흔적과 유물을 촬영하게 했다. 다큐멘터리 작업이 끝나자 건축가 쿨라파트 얀트라샤트가 리노베이션을 시작했다. 안도 다다오와 팀을 이뤄 유수의 미술관을 설계했던 얀트라샤트는 “모리스는 사원의 외벽과 조각을 보존하길 원했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번처럼 으스스한 공간에서 까다롭게 작업한 적은 없었다”고 밝혔다. 4년 여의 공사 끝에 MAF는 올봄 대중에게 공개됐다. 

1만219㎡(3,091평) 부지에 4개층으로 이뤄진 MAF는 규모에 있어선 MoCA, 더 브로드와 맞먹는다. 그러나 가고자 하는 방향은 딴판이다. 필립 베르뉴 MoCA 관장은 “더 브로드의 일라이 브로드가 매끈한 작품들로 국제적 명성을 원한다면, 모리스는 LA작가들에 집중하려 한다”고 평했다. 보다 대담하고, 모험적인 무대가 펼쳐질 것이란 예측이다. 

모리스 마르시아노는 “MAF의 컬렉션과 우리의 열정을 대중과 나누고 싶다. 한데 MAF를 여는 정말 중요한 이유는 LA의 작가들에게 표현의 장을 마련해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다. 예술은 엄청난 속도로 변모 중이니까”라고 밝혔다. MAF는 개관전에서도 그랬듯 외부 큐레이터를 폭넓게 기용해 신선한 시각으로 프로젝트를 시행할 방침이다. 

얼마 전 LA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 판매점인 왈리스를 인수한 모리스는 “아트와 와인, 이게 전부다. 우리가 인생에서 즐기는 것이. 이 즐거운 걸 모든 이들과 나누고 싶다”며 미소 지었다. 지극히 프랑스인다운 목표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소망대로 MAF가 물 흐르듯 자유롭게 흘러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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