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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계서 가장 돈 많은 천재 싱글남, 폴 앨런 스포츠구단, 전투기에 이어 그림도 컬렉션

이영란



상) 자신이 수집한 전투기와 포즈를 취한 폴 앨런
하) Jan BRUEGHEL the Younger, the Five Sense_ Sight, 1625, 폴 앨런 소장

폴 앨런(Paul ALLEN, 1953- )은 전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싱글남이다. 그는 ‘친구 잘 만나 덜컥 부자가 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친구는 바로 마이크로소프트(MS) 공동창업자 빌 게이츠다. 하지만 폴 앨런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빌 게이츠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앨런이 친구에게 ‘개인용 컴퓨터(PC)의 소프트웨어를 만들자’라고 하지 않았다면 MS도, 지금의 빌 게이츠도 없었을 것이다. 먼저 손을 내민 쪽은 앨런이다.

1974년 12월 눈이 부슬부슬 내리던 날, 컴퓨터에 심취해 있던 21살의 앨런은 단짝 친구를 만나러 시애틀에서 보스턴으로 날아왔다. 하버드 스퀘어에서 컴퓨터 잡지 『파퓰러 일렉트로닉스』신 년호 커버스토리로 소개한 최초의 PC인 <알테어8800>를 접한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앨런은 하버드생이던 게이츠에게 잡지를 내밀며 “우리가 알테어를 위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개발하자”라고 제안했다. 이에 게이츠는 휴학계를 내고, 뛰어들었다.

이로써 IT 역사의 가장 괄목할만한 도전이 시작됐다. 이듬해 두사람은 MS를 창업하고, MS-DOS를 세상에 내놓았다. 훗날 앨런은 “아마도 우리가 나이가 더 많았거나, 뭘 좀 더 알았더라면 그 일을 엄두도 못 냈을 거다. 그러나 우리는 젊었고, 어떻게든 해낼 수 있으리라 믿는 풋내기였다”라고 회고했다. 무모했기에 덤벼들었다는 것. 이렇듯 못 말리는 컴퓨터광이자, 아이디어로 충만했던 앨런은 1983년, 호지킨 림프종이라는 병에 걸려 MS를 떠날 때까지 미친 듯 일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거나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꿈꾸는 아이디어가 어떻게 실현될지 너무도 궁금해 혼신을 다했다.

포브스가 집계한 폴 앨런의 자산은 20억 달러(한화 2조 2,480억 원). 세계 부호순위 43위다. 이 부자는 결혼도 안 했고, 자녀도 없으니 싱글라이프를 맘껏 즐기며 흥청망청 살아도 된다. 하지만 앨런은 음악, 스포츠, 전투기, 우주여행, 뇌과학, 인공지능, 영화, 미술을 넘나들며 광폭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20대 후반 암에 걸려 생사를 넘나들면서 그의 인생관은 크게 바뀌었다. ‘가진 돈 쓰며 세월을 죽이는 것처럼 무료한 건 없다’라고 느낀 그는 사회공헌에 뛰어들었다. 과학계와 의학계에 수천만, 수억 달러를 내놓았다. 또 1997년 시애틀의 시호크스 풋볼팀을 2억 8,800만 달러에 사들였고(현재 가치는 22억 달러로 치솟았다), 농구, 축구 구단도 인수했다. 우주 관광 시대를 앞당기기 위해 풋볼경기장(110m)보다 큰 세계 최대 비행기 스트래토란치(가로 118m)도 제작 중이다. 오는 2019년 말에는 이 거대한 비행기에 로켓을 실어, 1만m 상공에서 쏘아 올릴 계획이다. 앨런은 음악도 광적으로 좋아한다. 10대 시절 지미 헨드릭스의 신들린 기타연주에 흠뻑 빠져 일평생 기타를 튕겨왔다. 헨드릭스가 요절하자 건축가 프랭크 게리에게 의뢰해 팝 음악 박물관을 만들었다. 세계적 뮤지션인 믹 재거, 보노와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음반도 만들었다.




에드워드 마네, 베네치아 풍경_대운하, 1874, 폴 앨런 소장

그런 그가 최종 목적지로 삼은 곳은 아트월드다. 미술이야말로 뻔하지 않고, 펄떡펄떡 꿈틀대기에 좋아한다. 1986년부터 미술품을 수집하고 있는 앨런은 “예술의 깊이가 나를 놀라게 한다. 너무나 재밌다”라고 고백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과 가깝게 지냈다. 아버지는 대학도서관에서 일했고, 교사였던 어머니 역시 책을 좋아했다. 아들은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던 『피카소 화집』을 자주 들춰봤다. 거실 탁자에 놓인 로댕의 복제조각 <생각하는 사람>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다. 성공한 비즈니스맨이 된 뒤 앨런은 <생각하는 사람>의 원본 조각을 사들였다. 그의 아트컬렉션은 앤틱에서 시작됐다. 그러다가 르네상스 화가 보티첼리, 17세기 화가 브뢰헬의 걸작을 사들였다. 세잔과 클림트의 작품도 수집했고 모네, 마네, 르누아르, 고갱 등 인상파 화가의 작품을 수집했다. 또 점묘파 화가 쇠라의 대표작과 자코메티의 인물상도 구입했다.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의 <오렌지와 노랑>은 2012년 당시 8,000만 달러를 호가했던 매혹적인 그림이다.

그는 알렉산더 칼더, 윌렘 데 쿠닝, 에드워드 호퍼를 거쳐 최근에는 루시안 프로이드, 프랜시스 베이컨, 데이비드 호크니, 게르하르트 리히터, 데미언 허스트로 컬렉션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앨런은 런던 테이트모던에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만화 같은 회화를 보고 전율을 일으켰다. 그 후 리히텐슈타인의 <키스>를 거금을 주고 사들였고, 음반제작자 데이비드 게펜의 조언에 따라 다소 난해한 작업인 잭슨 폴락, 바넷 뉴만, 에드 루샤의 작품을 수집했다. 앨런은 절친인 게펜에게 “지미 헨드릭스의 기타연주와 잭슨 폴락의 페인팅은 신기하게도 맥을 같이 한다. 한없이 자유로운 표현, 실험적 접근이 똑 닮았다”라고 감탄했다.

워낙 괴짜요, 몽상가인 앨런은 미국 상류사회와는 거리를 뒀었다. MS가 승승장구하자 한때 ‘세계 5위 부자’에 선정되기도 했지만 완고함을 못 버려 “멍청한 슈퍼리치” “지갑 지키기 바쁜 인간”으로 불려왔다. 이미지가 썩 좋지 않았던 것. 그는 자신의 아트컬렉션에 대해서도 철저히 함구해왔다. 직원들에게도 일체 언급을 못 하게 했다. 하지만 2009년, ‘또 다른 림프암에 걸렸다’라는 진단을 받으면서 태도가 달라졌다. 꼭꼭 숨겼던 컬렉션도 공개하기 시작했다. 앨런은 자신의 방대한 컬렉션 중 풍경화만을 모아 워싱턴DC와 시애틀에서 ‘Seeing Nature’전을 개최했다. 또 골갱이에 해당하는 그림 300여 점을 47개 장소에 빌려주고 있다. 최근 앨런은 “작품을 수집해 집에 두고 즐기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지만, 이를 뮤지엄에 대여해 다른 이들과 함께 즐기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더라”라고 토로했다. 열린 자세로 변모한 것. 

폴 앨런의 자문역인 뉴욕의 한 인사는 “그의 컬렉션처럼 탄탄하고 마니아적인 컬렉션은 보질 못했다”라고 평했다. 뉴스위크는 2012년, 앨런 컬렉션의 가치가 10억 달러를 웃돌 것이라고 전했다. 5년이 흐른 현재는 그 가치가 더욱 상승했을 것이다. 앨런의 컬렉션은 르네상스에서 현대미술까지 550년에 이르는 시대적 두께만큼이나 그 결이 무척 다채롭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유난히 좋아하는 그는 베네치아를 그린 풍경화를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그 결과 카날레토, 마네, 모네, 터너의 베네치아 풍경이 한데 모였다. 또 보티첼리의 우아한 그림은 그 우아함 때문에, 폴락과 데 쿠닝의 역동적인 회화는 역동적이어서 좋아한다. 외골수로 소프트웨어 개발에 매달렸지만, 미술만큼은 무수히 많은 결을 폭넓게 음미하고 있는 것. 그 때문일까? 요즘 그는 협업을 중시하고 있다. 후배들을 돕는 ‘벤처 자선’에도 적극적이다. 한동안 사이가 불편했던 빌 게이츠에 대해서도 자서전 『아이디어 맨』(2011)에서 “그가 있었기에 나의 아이디어가 빛을 볼 수 있었다”라고 고마워했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부(富)를 획득한 이 아이디어 맨은 이미 재산의 75%를 내놓은 상태다. 빌 게이츠, 워런 버핏이 만든 기부단체 ‘기빙 플래지’에 편지를 보내 “죽은 후에도 기부활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자신의 부를 ‘새로움을 창조하는 일’에 쓰고 싶어 하는 그는 EMP(Experience Music Project)뮤지엄, 뇌과학연구소, 비행기 전시관, 앨런패밀리재단을 만들어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제공하고 있다. 또 여동생과 함께 영화도 제작 중이고, ‘시애틀 아트페어’도 창설했다. 슈퍼리치인 그의 꿈은 화려한 저택이나 멋진 차, 예쁜 아내가 아니다. 스포츠, 음악, 미술, 영화에 대한 열정, 서로 연결된 세상에 대한 비전, 우주에 대한 동경, 인간 두뇌에 대한 경외심이 그의 꿈을 이루는 요소다. 

이미 이뤄진 것 보다, 이룰 가능성이 있는 것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이 공상가는 또다시 암과 싸우면서 “목숨이 붙어있는 한 새롭게 사고하고, 계속 빅 아이디어를 사냥하겠다”라고 다짐했다. 새로운 사고, 새로운 사냥을 위해서도 아트와의 소통을 줄기차게 이어갈 것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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